•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효장세자묘지문(孝章世子墓誌文)

자료명 효장세자묘지문(孝章世子墓誌文) 저자 이행(李緈), 이금(李昑), 이금(李昑),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 작성시기 1729
· 비고 2-5284-1, 2-5284-2, 2-5284-3
172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행(李緈) 1719 - 1728 조선 왕족
찬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서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199.5/중187.5/하189.0 X 상87.7/중90.4/하90.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3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효장세자(孝章世子) 묘지석(墓誌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효장세자묘지문(孝章世子墓誌文)
[내용 및 특징]
영조(英祖)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의 묘지석을 탁본하여 상․중․하 3점의 족자로 나누어 장황한 것이다. 지문은 사자(死者)의 전기(傳記)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써 판석인 지석에 새겨 매장하였으며, 지석을 묻기 전에 탁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큰 판석 2개에 나누어 새긴 효장세자묘의 지문은 영조(英祖)가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효장세자묘지문 탁본이 상5점, 중4점, 하3점 등 모두 12점이 소장되어 있다.
대다수 족자의 천리(天裏)에는 좌우 폭을 3등분한 자리에 미색비단으로 된 풍대(風帶)를 대었다. 족자의 하단에는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는데, 목축 좌우의 막구리(莫只)에는 둥글게 깎은 옥을 부착하였다. 또한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는 지각(地脚)의 비단으로 덮혀 보이지 않게 하였다. 『효장세자예장도감의궤(孝章世子禮葬都監儀軌)』에 의하면 이 옥은 강도가 연한 상품의 성천옥(成川玉)을 구하기 어려워 부득이 단단한 남양옥(南陽玉)을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효장세자묘지문 ‘상’에는 지석의 측면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어제 유명조선국효장세자묘지석(御製 有明朝鮮國孝章世子墓誌石)’이라 쓴 표제자(表題字)를 장황하였다. ‘중’과 ‘하’에는 지문의 내용을 탁본하였는데, 한 면에 17행씩 맞추어 소해(小楷)로 써서 새겼다.
효장세자의 자는 성경(聖敬), 이름은 행(緈), 시호는 효장(孝章)이다. 영조의 맏아들로 비(妃)는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172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에 사망하여 이복동생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왕세자가 되었다. 사도세자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養子)가 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사가(私家)의 분묘보다 후한 양식으로 장례할 것을 명하였고, 장례의 절차는 묘소도감과 예장도감에서 주관하였다. 1729년(영조 5) 1월 26일에 장례를 마치고 묘호(墓號)를 효장묘(孝章墓)라 하였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조리읍 봉일천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는 지문에서 10년의 짧은 삶을 살았던 효장세자의 행적을 열거하고, 자식을 잃은 자신의 애통한 심경을 기록하였다. 효장세자를 회임한 정빈이씨(靖嬪李氏)의 태몽으로부터 3세 때 입궐하여 양전(兩殿)에게서 총애를 받던 시절과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음에도 의젓했던 세자의 품행들을 조목조목 적었다. 효장세자는 9세가 되던 영조 3년(1727) 태학(太學)에 입학하였고, 그해 9월에는 관례(冠禮)와 가례(嘉禮)까지 올려 기쁨을 주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죽음은 영조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학문에 대한 재능과 영민함이 남달랐던 효장세자를 자신과 나라의 복으로 여겼을 만큼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부정은 각별했다. 위독한 중에도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걱정하는 효장세자의 효정을 영조는 특히 강조하여 기술하였다. 그리고 당시 자신의 심정을 지문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 애통함을 생각하자니 마치 살을 베는 듯하여(중략) 행록(行錄)에 몇 가지 문자를 첨가해 친히 돌에 새겨 넣고 유실(幽室)에 간직하게 한다. 아! 이 회포를 어찌 펼 수 있겠는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효장세자를 향한 영조의 애정은 지문을 자신이 직접 짓고 쓴 점, 그리고 후에 정조가 된 왕세손에게 효장세자의 추존을 당부한 일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탁면의 글씨는 조맹부체(趙孟頫體)를 기반으로 평직, 단정함을 추구한 전형적인 영조어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효장세자묘의 지석에 대해서는 『효장세자예장도감의궤(孝章世子禮葬都監儀軌)』에 자세한 기록이 확인된다. 효장세자의 묘역에는 2편의 지석을 묻었는데, 1724년(영조 즉위) 경종(景宗)의 국장 때에 채취해 놓은 것 가운데 호조에서 보관하던 김천석(金川石)을 사용하였다. 지석의 매 편 크기는 예기척을 사용하여 길이 4척 2촌 4푼, 넓이 2척 9촌 5푼, 두께 5촌 9푼이었다.
글씨를 새긴 공정은 우선 정세(精細)하게 석면을 두드린 다음, 1차로 대사(大沙), 2차로 세사(細沙), 3차로 정옥사(碇玉沙)를 사용하여 마감하였고, 마지막으로 숫돌로 고르게 다듬었다. 그 뒤 지문의 자획을 계산한 뒤 주홍색으로 자간을 인찰(印札)하여 글자를 새겼으며, 그 다음으로 인출하여 족자를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땅에 묻기 전에 여러 본을 탁본하였는데, 5전(殿)에 진상하고 난 후, 등록에 따라 도제조, 양당상, 도청, 본방낭청, 감조관, 차지중사 등에게 각 한 건씩 분아하였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족자는 장례일 직전에 탁본한 여러 점 가운데 한 점에 해당하며, 궁중에 내입한 외에도 도제조를 비롯한 관료들에게 분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소장기호 ‘2-5284-2’번 족자의 바깥 면에는 ‘예장도감장진(禮葬都監粧進)’이라는 묵서가 적혀 있다. 이는 이 족자를 당시 예장을 주관한 예장도감에서 제작하여 왕실과 역사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나누어주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자료적 가치]
효장세자의 삶을 영조가 직접 쓴 지문의 내용으로 살필 수 있다. 또한 조맹부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글씨를 쓴 영조의 어필을 감상할 수 있고, 18세기 전반 금석문의 제작방식과 장황형식까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규장각 14874)
『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647)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 2003.
『영조대왕 글․글씨』 궁중유물전시관, 2001.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