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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세자묘비(孝章世子墓碑)

자료명 효장세자묘비(孝章世子墓碑) 저자 이행(李緈), 미상, 미상, 조문명(趙文命),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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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 작성시기 1729
· 비고 2-5280
172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행(李緈) 1719 - 1728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조문명(趙文命) 1680 - 1732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231.5 X 120.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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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효장세자(孝章世子) 묘표석(墓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효장세자묘비(孝章世子墓碑)
[내용 및 특징]
영조(英祖)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의 묘표석(墓表石)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1729년(영조 5) 1월 효장세자의 장례 때에 표석을 세웠고, 그 직후에 탁본한 것으로 추정된다. 탁면은 마멸된 흔적이 없고, 자획의 윤곽이 선명하다. 효장세자의 묘는 후에 현빈조씨(賢嬪趙氏)와 함봉되고, 정조(正祖) 때에는 영릉(永陵)으로 추존되었으며, 순종(純宗) 때에 이르러 소황제(召皇帝)로 추존되었다. 추존될 때마다 표석이 하나씩 증가하였는데, 효장세자묘의 표석이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표석의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로 만든 자료가 3건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족자 3건의 장황은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국화문이 있는 남색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비단을 대었다. 여기에도 동일한 국화문이 직조되어 있다. 천리에는 좌우의 폭을 3등분한 자리에 미색비단으로 풍대(風帶)를 두 가닥 부착하였다. 남색비단과 사양의 국화문은 매우 섬세하며, 국화도안 주위에 당초문을 연상시키는 규칙적인 곡선을 넣어 문양이 자연스럽게 반복되도록 하였다. 족자의 하단에는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는데, 목축(木軸) 좌우의 마구리(莫只)에는 둥글게 깎은 옥을 부착하였고,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는 천리의 비단에 덮히게 하여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규장각 소장 『효장세자예장도감의궤(孝章世子禮葬都監儀軌)』에 의하면 이 옥은 강도가 연한 상품인 성천옥(成川玉)을 구하기 어려워 부득이 단단하며 가공이 어려운 남양옥(南陽玉)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효장세자의 자는 성경(聖敬), 이름은 행(緈), 시호는 효장(孝章)이다. 영조의 맏아들로 비(妃)는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172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에 사망하여 이복동생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왕세자가 되었다. 사도세자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養子)가 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사가(私家)의 분묘보다 후한 양식으로 장례할 것을 명하였고, 장례의 절차는 묘소도감과 예장도감에서 주관하였다. 1729년(영조 5) 1월 26일에 장례를 마치고 묘호(墓號)를 효장묘(孝章墓)라 하였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조리읍 봉일천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석의 전면에는 ‘조선국 효장세자묘(朝鮮國 孝章世子墓)’라는 글자를 2행에 걸쳐 소전체(小篆體)로 새겼다. 전서는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이 썼는데 그는 글씨에 능하여 청주《삼충사사적비(三忠祠事蹟碑)》, 《북백관재우묘표(北伯郭再祐墓表)》도 그의 글씨이다.
음기는 서사관이 단정한 해서로 썼다. 내용은 효장세자의 탄생, 세자 책봉, 그리고 졸년의 간지와 연월을 기록하고 장지는 성종비(成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인 파주 순릉(順陵) 왼쪽 언덕의 을좌향(乙坐向)이며, 외안산(外案山)은 묘좌(卯坐)로 기록되어 있다. 전면의 전서와 음기를 새긴 비석 측면에는 후일 빈(嬪)의 관을 묻고 합봉할 때 묘표를 써서 넣을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장서각에 소장된 《효장세자묘합봉비(孝章世子墓合封碑)》를 살펴보면 뒤에 현빈조씨를 합봉할 때에는 새로운 표석을 세우지 않았고 효장세자묘 표석의 공면에 현빈을 부좌한다는 표제와 음기를 써넣었음이 확인된다.
한편 규장각 소장 『효순현빈예장도감의궤(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에 의하면 표석은 족자로 만든 후 의례에 따라 나누어 소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표석은 지석의 탁본과 함께 족자로 만들었는데, 지석을 분아(分兒)한 예로 미루어 보면, 5전(殿)에 먼저 진상하였고, 등록에 의거하여 도제조, 양당상, 도청, 본방낭청, 감조관, 차지중사 등에게 각 한 건씩 나누어졌다. 즉 한 번에 여러 점의 탁본을 만들어 왕실의 장례 준비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이는 장례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갖게 하고 자신의 참여한 역사(役事)에 대한 기록물이자 기념물의 기능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금석문은 《효장세자묘합봉비(孝章世子墓合封碑)》와 함께 하나의 표석에 장례의 시기가 다른 세자와 세자빈의 표문을 차례로 새겨 넣은 사례를 보여주며, 18세기 중반 탁본과 그 장황방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규장각 14874)
『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64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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