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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왕탄강구기비[추각](仁祖大王誕降舊基碑[追刻])

자료명 인조대왕탄강구기비[추각](仁祖大王誕降舊基碑[追刻]) 저자 이종(李倧), 이관명(李觀命), 이정신(李正臣), 김제겸(金濟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49-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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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황해도 해주시 (현재주소: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남본리)
· 작성시기 1720
· 비고 2-5249-1, 2-5249-2
1720년(건립)/1727년(추각)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종(李倧) 1595 - 1649 조선 왕족
찬자 이관명(李觀命) 1661 - 1733 조선 문신
서자 이정신(李正臣) 1660 - 1727 조선 문신
전서자 김제겸(金濟謙) 1680 - 1722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전234.5/음기235.0 X 전99.4/음기99.1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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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의 출생지 해주(海州)에 세운 탄강구기비(誕降舊基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조대왕탄강구기비[추각](仁祖大王誕降舊基碑[追刻])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6대 국왕 인조(仁祖, 1595~1649)가 출생한 황해도 해주에 세운 탄강구기비(誕降舊基碑)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자료이다. 비석은 본래 1720년(숙종 46)에 세운 것이며, 1727년(영조 3)에 추가 내용을 보입하여 추각(追刻)하였다.
장서각에는 현재 전면과 음기를 탁본한 3종의 ‘인조대왕탄강구기비’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1690년(숙종 16)에 세운 비를 탁본한 것은 별도의 해제에서 다루었고, 나머지 2종인 1720년에 세운 비와 이 비를 추각하여 1727년 이후에 탁본한 자료만을 대상으로 하겠다. 이 2종은 전면과 음기의 2점을 각각 1종으로 본 것인데, 편의상 비문(가)(1720년 건립본, 2-5248-1과 2-5249-1)와 비문(나)(1727년 추각본, 2-5249-1과 2-5249-2)로 구분한다.
인조대왕탄강구기비는 1690년 숙종의 명에 의해 민암(閔黯, 1636~1693)이 지은 것을 세운 바 있다. 그런데 민암은 당색이 남인으로, 1680년 대사헌으로 있던 중 경신대출척으로 파직된 적이 있다. 그리고 1689년 기사환국 때는 서인들에 대한 탄핵과 처형에 강경론을 주장한 연유로,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때 제주도 대정으로 위리안치된 뒤 사사되었다. 따라서 서인들이 집권한 뒤 민암이 지은 구기비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719년(숙종 45) 11월 18일의 실록 기사에는 경종이 왕세자로 청정할 당시 지평(持平) 홍우전(洪禹傳)이 인조의 해주 탄강구기의 비문은 역신 민암이 찬술한 것이라 하여 새로 찬술한 비문을 세우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경종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이관명(李觀命)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비문 음기에도 세자가 이관명에게 구기비는 역신이 지은 것으로 후세에 그대로 전할 수 없으니 이관명이 개술(改述)하라고 한 내용이 확인된다.
구기비의 장황 형식을 보면, 비문(가)는 백색의 종이로만 장황하여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를 구분하지 않았다. 비문(나)_는 족자의 천리와 지리에 남색 비단을 대었으나 문양은 직조하지 않았고, 상단에 풍대(風帶)도 부착하지 않았다. 사양(四鑲)에는 화조문(花鳥紋)이 있는 미색 비단을 대었다. 족자의 하단에는 목축(木軸)을 달았고, 축의 양 끝인 막지(莫只)에는 옥을 찌우지 않고 나무를 깍아 만들었다. 2점 모두 전면의 상태나 자획의 명확도, 그리고 먹색을 입힌 표면이 고르고 양호한 편이다.
전면은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의 9자를 소전체(小篆體)‘로 새겼고, 음기는 19행의 내용을 모두 해서체로 새겼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인조가 해주에서 탄생한 사실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태몽이야기, 그리고 이곳에 비를 세워 사적화(史蹟化)하려는 과정과, 인조대왕의 탄생을 송축하는 내용들이다.
최초의 인조대왕탄강구기비는 인조의 탄생으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690년에 인조의 사적(史蹟)을 현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며, 1720년에는 처음의 원비를 대신하여 새운 비를 세웠다. 인조가 출생할 때 인헌왕후의 어머니인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가 꾼 태몽 또한 이 터를 더욱 기념하게 하는 일화로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헌왕후가 산기가 있을 때, 홀연히 붉은 빛이 밝게 빛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이때 부부인 신씨가 옆에서 졸다가 꿈에 붉은 용이 모후 옆에 있는 것을 보았고, 또한 병풍에 ‘귀자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이라 쓰인 글씨를 보았다고 한다. 이에 부부인이 깨어나 보니 아이가 탄생해 있었는데, 이가 바로 인조라는 내용이다.
비문(가)의 마지막 행에는 ‘강희오십구년이월 일 립(康熙五十九年二月 日 立)’이라고 적혀 있어, 1720년에 건립한 것이 되고, 비문(나)의 2점은 추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1727년에 추가로 새긴 것이다. 1720년에 세운 비문의 내용에 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추가로 새겨넣은 것이다. 추각한 글자는 40자로 원비문의 마지막 행에 새겨 넣었다. 내용은 ‘移蹕海州及 回鑾之月有差誤 命考 實錄十月之十當作八數月當作月餘 雍正五年二月 日 奉 敎追刻’이다. 따라서 추각한 시점은 옹정 5년인 1727년임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잘못 된 부분은 비음기의 내용 가운데 ‘遂克復京城其年十月 上移蹕海州留數月回鑾’이라고 쓴 부분이다. 여기에서 ‘十月’을 ‘八月’로 ‘數月’은 ‘餘月’로 고쳐야 함을 밝힌 것이다. 즉 인조가 해주에 일시 머문 것은 10월이 아닌 8월이며, 그 기간은 수개월이 아닌 한 달 남짓이라는 것이다.
전면의 전서는 사간원 헌납 이제겸(李濟謙, 1680~1722)이 썼고, 음기의 내용은 대제학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이 썼으며, 호조참판 이정신(李正臣, 1660~1727)이 글씨를 썼다. 김제겸은 본관이 안동이며, 김수항(金壽恒)의 손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아들이다. 1719년 증광문과에 합격한 이래 최고관직은 승지까지 올랐다. 이 탁본의 전서는 이제겸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41세에 쓴 것이다. 글자의 결구와 장법 면에서 매우 짜임새 있는 소전체를 보이고 있다. 음기를 쓴 이관명은 본관이 전주이며 판서를 지낸 이민서(李敏敍)의 아들이다. 1689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응제문(應製文), 반교문(頒敎文), 시책문(諡冊文) 등을 많이 남길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 글씨를 쓴 이정신의 본관은 연안이며 이명한(李明漢)의 증손이다. 1699년 정시문과에 합격하였고,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거친 뒤 호조참판에까지 올랐다. 당시 글씨로 이름이 높아 여러 편의 비문을 쓰기도 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탄생지에 대한 사적화(史蹟化) 과정을 살필 수 있고, 후대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금석문의 개립(改立), 오류의 수정을 위햔 추각(追刻)의 과정까지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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