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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자료명 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저자 최씨(崔氏), 박필성(朴弼成), 이방(李枋), 이요(李橈),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67-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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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
· 작성시기 1725
· 비고 2-5267-1, 2-5267-2
172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최씨(崔氏) 1670 - 1718 조선 후궁
찬자 박필성(朴弼成) 1652 - 1747 조선 문신
서자 이방(李枋)
전서자 이요(李橈) 미상 - 미상 조선 종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상284.0/하283.4 X 상111.2/하110.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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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신도비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9대 임금인 숙종의 후궁이자 21대 영조의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신도비 탁본하여 장황한 금석문 자료이다. 1725년(영조 1) 순화방(順化坊)에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지으며 소녕원에 조성한 것이다. 박필성(朴弼成)이 짓고, 이방(李枋)이 글씨를 썼으며, 이요(李橈)가 전액을 썼다. 전면과 후면을 각각 따로 탁본하여 장황하였다. 국화문 비단으 풍대(風帶)를 붙여 표구하였고 목축(木軸)을 달아 만들었다. 앞면의 상단에는 ‘숙빈최씨(淑嬪崔氏)’, 후면에는 ‘신도비명(神道碑銘)’의 전액(篆額)이 있다. 후면에는 숙빈 최씨의 가계와 입궁(入宮), 후의 행력(行歷), 후손을 밝혔다. 또한 절제 있고 신중했던 성품과 행실을 칭송하였다.
장서각에는 같은 금석문이 세 점 소장되어 있는데, 일부 자료는 천리(天裏) 부분이 휏노되어 예전에 보수한 흔적이 있지만 보존상태는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숙빈 최씨 장례 때의 묘비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소녕원(사적 제358)의 진입로 입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숙빈 최씨 사후 8년 뒤인 영조 1년(1725)에 영조의 명으로 세운 것이다.
숙빈 최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1693년(숙종 19) 숙원(淑媛)에 봉해졌고,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듬해 왕자 연잉군을 생산하고 이 해 숙의(淑儀)에 올랐으며, 이듬해 귀인(貴人)으로 승자(陞資)되었다. 연잉군은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21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영조이다. 1699년(숙종 25) 내명부 정1품인 숙빈에 올랐다. 1718년(숙종 44) 3년간 앓아온 병이 위중해져 궁을 나와 창의동 사제에서 요양하다가 결국 3월 9일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 49세였다. 소생으로는 왕자 세 명이 있었지만 첫째와 막내는 일찍 죽고 둘째 왕자가 후에 영조가 되었다. 숙빈 최씨가 사망하자 숙종은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제수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는 등 직접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해 5월 12일 양주(楊州 )에서 예정하고 9월에 묘비를 세웠다.
영조는 즉위 초 자신의 친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순화방에 세웠다. 또한 묘의 관리는 대원군(大院君) 봉사손(奉祀孫)의 예를 준행하여 4대 이후에도 돈녕정(敦寧正)이 세습하도록 하고, 전감(典監)을 두어 수호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1753년(영조 29) 시호를 올려 ‘화경(和敬)’이라 하고, 묘(廟)를 육상궁(毓祥宮), 묘(墓)를 소녕원(昭寧園)으로 각각 개상(改上)하였다. 한편 1761년(영조 37)에는 숙빈 최씨가 태어난 서학동(西學洞) 여경방(餘慶坊) 옛집의 형지(形址)를 그려오게 하는 한편, 숙빈 최씨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洪繼南)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살면서 전매(轉賣)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비문을 지은 박필성(朴弼成, 1652~1747)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자는 사홍(士弘), 호는 송설(松雪齋), 효정(孝靖)의 시호를 받았다. 효종의 사위이며, 도정을 지낸 박태장(朴泰長)의 아들이다. 숙종 때에 네 차례 사은사 또는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영조 때에는 장수하여 1741년 오언시와 궤장을 받았다.
전액을 쓴 이요(李橈, 생몰년 미상)는 선조(宣祖)의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이다. 종실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학문이 깊고 달변이었다고 한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요는 당시 종실의 금석문을 비롯하여 책보(冊寶) 등을 많이 썼던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전반 선조계(宣祖系) 종친들 중 글씨를 가장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왕실 편찬업무에 수시로 차출되어 『선원록』과 『국조어첩』 등의 자료를 필사했으며, 궁궐의 현판과 왕족들의 묘비명을 도맡아 썼다. 특히 송설체에 특장이 있어 명성이 있었던 듯,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종친 가운데 서평군 이요가 있는데, 지위는 일품으로 촉체를 잘 써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왕실의 문자를 많이 써서 작위가 오르고, 상을 많이 받아 이로 인해 영조의 지우를 입어 마침내 종친의 수반에 올랐다.”고 기록하였다.
숙빈 최씨와 관련한 금석문 자료는 이 자료 외에도 《숙빈최씨소녕묘비(淑嬪崔氏昭寧墓碑 )》, 《화경숙빈소녕원비(和敬淑嬪昭寧園碑)》, 《숙빈최씨소녕묘갈(淑嬪崔氏昭寧墓碣)》, 《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등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환국(換局)’으로 대변되는 숙종 대 정치상황과, 후궁에서 빈까지 이른 왕실여성의 삶을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들 영조에 의한 추숭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숙빈 최씨 관련 금석문을 일괄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御製』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京畿金石大觀』 경기도, 1982~199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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