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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왕후익릉비(仁敬王后翼陵碑)

자료명 인경왕후익릉비(仁敬王后翼陵碑) 저자 김씨(金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62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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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 작성시기 1724
· 비고 2-5262
1720~172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김씨(金氏) 1661 - 1680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215.0 X 116.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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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숙종비(肅宗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능표석(陵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경왕후익릉비(仁敬王后翼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9대 왕인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의 능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자료이다. 표석의 전면과 음기를 하나의 족자로 만들었으며, 탁면의 상태가 좋고 글자의 획이 선명하며, 먹을 입힌 상태도 양호하다. 전면에는 ‘조선국 인경왕후익릉(朝鮮國 仁敬王后翼陵)’의 9자를 소전체(小篆體)로 써서 새겼고, 음기에는 해서로 쓴 내용에 왕후의 탄생, 세자빈 책봉, 왕비의 진봉 및 승하한 해의 간지와 월일, 그리고 장지를 적었다. 익릉비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권 20에도 수록되어 있다.
족자의 장황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남색 비단을 대었으며, 천리의 상하 길이는 지리의 약 2배 비례로 하였다. 문양은 국화문을 규칙적으로 도안하여 직조하였다. 탁면 상하와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 비단인 백릉(白綾)을 대었는데, 여기에도 천리, 지리와 동일한 국화문이 직조되었다. 천리에는 좌우를 등간격으로 나누어 미색 비단으로 풍대(風帶)를 부착하였다. 족자의 하단에는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는데, 목축(木軸) 좌우의 막지(莫只)에는 둥글게 깎은 옥을 부착하였고,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는 지리의 비단으로 감아 보이지 않게 하였다.
비석의 소재지인 익릉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리 서오능 묘역 내에 있다. 이 능은 숙종 연간에 조영되었지만, 상설의 간소화 교령이 내려지기 이전의 것이므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제도를 따랐다. 상설은 곡장(曲墻) 3면, 난간석(欄干石 ) 12칸, 혼유석(魂遊石)1, 명등석(明燈石) 1, 망주석(望柱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무인석(武人石) 1쌍, 마석(馬石) 1쌍, 양석(羊石) 1쌍, 호석(虎石) 1쌍, 정자각(丁字閣), 수라청(水刺廳), 망료석(望燎石), 표석(表石) 1, 홍살문(紅箭門)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인경왕후를 익릉에 장사한 날은 1681년(숙종 7) 2월 2일이지만, 이때 표석은 세워지지 않았다. 1681년의 인경왕후 국장에 대한 기록인 『인경왕후국장도감도청의궤(仁敬王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소장본)에는 지석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있지만, 표석을 세웠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 문헌기록을 종합해본 결과 익릉의 표석은 1720년(경종 즉위) 이후 경종년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종실록』1권 1720년 8월 28일조에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우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입시하여 영릉(寧陵)의 제도에 따라 각 능에 표석을 세울 것을 청한 내용이 있다. 그 중 김창집이 ‘이제 신릉(新陵)의 입석(立石)을 계기로 하여 숭릉(崇陵)과 익릉(翼陵)에도 연달아 세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고 청한 내용과 경종이 ‘신릉으로부터 차례로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답한 기사는 1720년 당시까지 표석이 세워지지 않았으며, 1720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익릉에 표석이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인경왕후 김씨는 본관이 광주(光州)이고, 아버지는 예학의 대가 김장생(金長生)의 4대손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1633~1687)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 군수(郡守)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1670년(현종 11) 10세에 세자빈(世子嬪)에 간택되었고, 이듬해 3월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1676년(숙종 2) 왕비의 책명(冊命)을 받았다. 20세가 되던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의 증세가 나타나 발병 8일만에 경덕궁에서 승하하여 이듬해 장례와 함께 봉릉(奉陵)되었다. 권유(權愈, 1729~1804)가 개찬(改撰)한 지문에는 인경와후가 어려서부터 공손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유희(遊戱)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왕세자빈이 된 이후에는 예정과 효성이 극진하였던 품행을 기록하였다.
젊은 나이에 승하한 인경왕후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인현왕후 때문에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장씨(禧嬪張氏)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는 계기가 되어 후일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등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1713년(숙종 39) 광렬(光烈), 1722년(경종 2) 효장명현(孝莊明顯), 1753년(영조 29) 선목(宣穆), 1776년(영조 52) 혜성(惠聖), 1890년(고종 27) 순의(純懿)의 존호가 각각 추상(追上)되었다.
[자료적 가치]
인경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 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仁敬王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553)
『仁敬王后國恤謄錄』(장서각 2-2995)
『仁敬王后誌文』(장서각 2-398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朝鮮王陵石物誌』 殷光俊 민속원, 1985.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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