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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대왕의릉비(景宗大王懿陵碑)

자료명 경종대왕의릉비(景宗大王懿陵碑) 저자 이윤(李昀),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6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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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산1-5)
· 작성시기 1724
· 비고 2-5268
172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윤(李昀) 1688 - 1724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226.5 X 152.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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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경종(景宗)의 의릉비(懿陵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경종대왕의릉비(景宗大王懿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0대 국왕 경종(景宗, 1688~1724)의 능인 의릉(懿陵)에 세워진 비문의 탁본이다. 1724년 양주군(楊洲郡) 양포리(梁浦里) 천장산(天藏山)(현 서울시 중랑구 석관동) 신좌지원(申坐之原)에 의릉을 조성하고 세운 것이다.
전면과 음기를 한 면에 표구하였다. 연화당초문(蓮花唐草紋) 비단에 풍대(風帶)를 부착하였으며, 제작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끈과 고리, 유소(流蘇)가 남아 있다. 전면은 전서대자(篆書大字)이며, 음기는 해서(楷書)로 써서 새겼다. 같은 금석문이 장서각에 2점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옥축(玉軸)을 사용하였다. 전면에는 ‘조선국경종대왕의릉(朝鮮國景宗大王懿陵)’이라 새겼고, 음기에는 경종의 탄생, 즉위, 승하, 향년 등의 내용을 시간 순으로 간략히 기록하였다.
경종의 휘(諱)는 윤(昀), 자는 휘서(輝瑞)로 숙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 장희빈)이다. 그는 1690년(숙종 16) 폐비 장희빈의 소생이라는 이유와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 세력들의 극한 반대에도 불과하고 아버지 숙종에 의해 세자에 책봉되었다. 따라서 경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였던 송시열은 사사되었고 서인은 한때 실각하였다. 어머니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어린 시절에는 총명함이 뛰어난 세자로 칭송을 받았고 숙종의 극진한 배려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복동생인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이 출생하였고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경종 또한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파되면서 숙빈 최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세자(경종)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희빈 장씨가 폐출되어 사사되면서 경종은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했고 숙종으로 부터도 견제와 미움을 받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1717년 숙종의 주도하에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으나, 그해 숙종이 몰래 노론의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세자가 무자다병(無子多病)함을 이유로 세자를 교체하여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 때문에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숙종은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고 싶었지만 정치적 부담으로 불가능하자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의 실정을 트집 잡아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할 속심이었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은 경종은 매우 신중한 처세로 숙종과 노론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숙종 사망까지 버텼으며 결국 조선 20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했고 노론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 등극 얼마 지나지 않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1721년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한 뒤 다시 노론이 그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때 소론의 극려한 반대에 부딪혀 대리청정을 수차례 번복하였다가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를 물리치고 친정(親政)을 하였다.
이런 정국의 혼란과 비정한 살육의 정치는 경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더구나 어머니의 죽음 등으로 경종은 화병(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1724년 즉위 4년이 되던 해 그의 건강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자리에 누운지 단 몇 일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그의 사망을 두고 세간에는 게장을 먹고 독살되었다는 등 무수한 추측이 난무하였는데 영조 대에 이르러 경종의 사망에 대한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왕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이고, 계비는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의릉은 1970년 사적 204호로 지정되었다.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무덤 주위로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왕릉 아래 있는 선의왕후의 능이 있다. 왕릉과 왕비의 전후로 비껴 쌍릉제(雙陵制)로 배치되어 있으나 각각 단릉(單陵)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석물의 배치와 전체적인 석물 양식은 숙종의 명릉(明陵)과 같은 양식이다. 한편 장서각에는 『의릉산릉도감의궤(懿陵山陵都監儀軌)』와 『경종대왕국휼등록(景宗大王國恤謄錄)』이 소장되어 있어 의릉의 조성과 국휼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를 합장한 후 의릉에 세운 『경종대왕의릉(합봉)비(景宗大王懿陵(合封)碑)』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어 두 금석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경종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8세기 초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장서각 2-2327, 2328)
『경종대왕국휼등록(肅宗大王國恤謄錄)』(장서각 2-2916)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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