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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왕명릉지문(肅宗大王明陵誌文)

자료명 숙종대왕명릉지문(肅宗大王明陵誌文) 저자 이돈(李焞), 이이명(李頤命),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9-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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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 작성시기 1720
· 비고 2-5259-1, 2-5259-2
172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돈(李焞) 1661 - 1720 조선 왕족
찬자 이이명(李頤命) 1658 - 1722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192.0/하208.8 X 상135.1/하135.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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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숙종(肅宗) 명릉지석(明陵誌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숙종대왕명릉지문(肅宗大王明陵誌文)
[내용 및 특징]
1720년(경종 즉위) 숙종이 사망하자 명릉(明陵)을 조성하고 지문(誌文)을 제작하여 탁본한 금석문이다. 숙종이 승하하자 그 유지에 따라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쌍릉(雙陵)으로 조성하였다. 처음 인현왕후의 장사를 지낼 때 숙종은 오른 편을 비워두게 명했었다. 명릉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 서오릉 내에 있다.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숙종와 명릉지석 탁본은 그의 장례 때인 1720년에 탁본한 것이 된다. 숙종이 승하하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우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이 의논하여 장문헌무경명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의 시호를 올리고, 묘호를 숙종(肅宗), 전호를 효녕(孝寧)으로 정해 올렸다. 이 해 10월 21일 명릉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릉지문의 탁본은 상․하 앞뒷면을 나누어 두 점으로 제작하였다. 족자 상하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옥색의 국화문 비단이고, 사양(四鑲)은 미색의 비단으로 표구하였으며, 옥축(玉軸)을 달아 마무리하였다. 천리, 지리 및 사양에 좀구멍이 있고, 옥색 비단이 탈색되어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좋지 못하다. 특히 천리 부분의 배접이 많이 훼손되었다.
명릉지문은 당시 판중추부사였던 이이명(李頤命)이 찬술하였다. 이 지문은 명릉의 비석인 명릉비(明陵碑)와는 달리 피전자의 생애와 업적을 매우 상세히 기술하였다. 숙종의 개인적인 인품과 학식으로부터 통치행위의 특징까지 상세하다.
숙종(1661~1720)은 조선 제 19대 국왕으로, 1674~1720까지 재위하였다. 이름은 돈(焞)이고, 자는 명보(明普)이다. 현종의 외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1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1667년(현종 8)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8월에 즉위하여 재위 46년이 된 해(1720)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왕비는 세 명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숙종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쟁의 폐해가 심화되고 붕당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의리명분론이 크게 성했던 까닭에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복관시켰다. 아울러 단종(端宗)을 복권시키고, 폐서인되었던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를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위하는 등 왕실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는 등 양란 이후 혼란한 시대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민생을 돌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각종 왕실 관련 전적과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국가전적을 편찬․간행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화적 성숙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지문은 지은 이이명(1658~1722)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이다. 세종의 아들 민성군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사헌 이민적(李敏迪)이고, 어머니는 의주부윤 황일호(黃一晧)의 딸이다. 이이명은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패하자 이를 주모한 김창집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남해에 유배되어 있던 중, 목호룡의 고변으로 이듬해 4월 서울로 압송, 사사되었다.
[자료적 가치]
숙종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 초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장서각 2-2327, 2328)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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