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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자료명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저자 이종(李倧), 이관명(李觀命), 이정신(李正臣), 김제겸(金濟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4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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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황해도 해주 (현재주소: 황해도 해주군)
· 작성시기 1720
· 비고 25248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종(李倧)
이관명(李觀命)
이정신(李正臣)
김제겸(金濟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43.8 X 91.0
· 판본 첩장본(帖裝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첩 1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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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 1595~1649)의 출생지 해주(海州)에 세운 탄강구기비(誕降舊基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내용 및 특징]
인조가 출생한 황해도 해주에 세운 탄강구기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자료. 인조대왕탄강구기비는 2기가 전하는데, 1690년(숙종 16) 민암이 짓고 이진휴가 쓴 것, 둘째, 1720년(숙종 46)에 이관명이 짓고 이정신, 김제겸이 쓴 것이다. 본래의 탄강구기비는 임진왜란 당시 해주에 머물던 인헌왕후(仁獻王后)가 인조를 출생한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적(史蹟碑的) 성격의 금석문이며, 1690년(숙종 16) 황해도관찰사 권환(權瑍)이 청하여 세운 것이다.
이 자료는 두 번째의 탄강구기비이다. 1727년 2월에 영조의 명을 받들어 추각(追刻)하였는데, 해주로 어가가 옮겨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온 달은 실록을 상고하니 8월이고, 몇 개월은 한달 남짓으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이 찬하였고 이정신(李正臣)이 글을 썼으며 제액(題額)은 김제겸(金濟謙)이 썼다. 비석의 이면(裏面)에 의하면 인조대왕이 탄생한 내력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임진년(1592년)에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이 의주로 행차했다가 10월에 어가를 해주로 옮겨 수개월간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왕비와 여러 왕자 및 비빈들에게는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을미년(1595년) 11월 7일에 인헌왕비(仁獻王妃)가 해주 백성인 우명장(禹命長)의 집에서 인조대왕을 낳았다고 한다. 그 후 현종 6년(1665년)에 목사(牧使) 홍석기(洪錫箕)가 그 곳을 찾아가 옛터를 공전(公田)으로 바꾸고 담장을 둘러쳐 보호하였고, 숙종 14년(1688년)에 관찰사 김구(金構)가 담장을 쌓고 대(臺)를 짓고 돌을 깎아 기문(記文)을 청하였으나 국상을 당하여 겨를이 없었다. 숙종 16년(1690년)에 관찰사 권환(權瑍)이 상서하자 비석을 대(臺)에 세우고 “인조대왕탄강구기(仁祖大王誕降舊基)”로 제하고 오늘에 이르러 비문을 찬술한다고 하였다. 옛 인물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이를 계기로 하여 당사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전형적인 유허비(遺墟碑)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난길에 오른 뒤 전세가 회복되자 거마(車馬)를 서울로 향하였다. 그 와중이던 1595년(선조 28) 8월에는 해주에서 얼마간을 머물렀다. 왕비와 여러 비빈, 그리고 왕자들도 여기에 함께 체류하였는데, 이때 원종(元宗)의 비인 인헌왕후가 인조를 출산하였다. 이를 기념한 이 비석은 인조의 탄생으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690년에 인조의 사적을 현양하기 위해 해주에 새운 것이다.
인조가 출생할 때 인헌왕후의 어머니임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가 꾼 태몽 또한 이 터를 더욱 기념하게 하는 일화로 전한다. 인헌왕후가 산기가 있을 때, 홀연히 붉은 빛이 밝게 빛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이때 부부인 신씨가 옆에서 졸다가 꿈에 붉은 용이 모후(母后) 옆에 있는 것을 보았고, 또한 병풍에 ‘귀자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이라 써진 글씨를 보았다. 이에 부부인이 깨어나 보니 이미 아기가 탄생해 있었는데, 이가 바로 인조라는 것이다.
인조가 탄생한 해주의 옛 터는 이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인조 사후 15년이 지난 1665년(현종 6)부터 이곳을 사적화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목사(牧使)인 홍석기(洪錫箕)가 1665년 구지(舊址)를 찾고서 그 땅을 사들여 담장을 둘렀으며, 1668년(숙종 14) 관찰사 김구(金構)가 세월이 오래되어 민멸될 것을 염려하여 축대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 또한 1690년(숙종 16)에는 관찰사 권환이 대 위에 비석을 세울 것을 주청하여 비를 건립하였다. 이것인 1690년에 이 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이다. 이와 같이 국왕의 탄강구기비를 세운 경우는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왕이 탄생한 터는 주요 사적지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적의 사실을 문자로 징험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김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공경과 흠모의 마음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다.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 「봉모당합내외봉장품목록(奉謨堂閤內外奉藏品目錄)」에는 《인조탄강구기비족자(仁祖誕降舊基碑簇子)》 1점이 보여 왕실에도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첫 비문을 지은 민암(閔黯)은 남인 관료로서 정치적인 부침을 겪은 끝에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사사되었다. 이후 서인들이 집권한 뒤 민암은 역신으로 지목되어 그가 지은 이 비석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1720년에 경종(景宗)의 명으로 이관명(李觀命)이 새로 지은 구기비가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이때 민암이 지은 1690년의 비는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조선금석총람』에는 1720년에 세운 구기비의 소재지가 황해도(黃海道) 해주군(海州郡) 해서면(海西面) 남본정(南本町)으로 되어있지만, 1690년에 세운 비에 대해서는 존재 유무나 소재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따라서 민암이 지은 비는 1720년의 새로운 비가 세워지면서 파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탄생지에 대한 사적화(史蹟化) 과정을 살필 수 있고, 후대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금석문의 개립(改立)과 파손과정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조선금석총람』하 / 조선총독부 /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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