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숙빈최씨묘비(淑嬪崔氏墓碑)

자료명 숙빈최씨묘비(淑嬪崔氏墓碑) 저자 최씨(崔氏),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2563-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
· 작성시기 1718
· 비고 2-2563-1, 2-2563-2
1718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최씨(崔氏) 1670 - 1718 조선 후궁(後宮)
찬자 미상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189.7/음기189.8 X 전68.7/음기68.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비 탁본이다. 비석은 1718년(숙종 44)에 세워졌다.
원자료제목
· 표제숙빈최씨묘비(淑嬪崔氏墓碑)
[내용 및 특징]
탁본은 전면과 음기로 나누어 각각 석류문(石榴紋)이 있는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애초 제작한 풍대(風帶)와 목축(木軸)이 남아 있다. 전면은 대자 해서로 ‘유명조선국후궁숙빈수양최씨지묘(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가 씌여 있고, 음기는 중자 해서로 씌여 있다.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이 비는 1718년(숙종 44) 숙빈 최씨가 승하하자 양주(楊州) 고령동(高嶺洞) 옹장리(瓮場里), 즉 현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동)에 장사지내며 세운 것이다.
음기에서는 숙빈 최씨의 본관이 해주(海州)이며, 숙종의 후궁임을 밝혔다. 이어 숙원(淑媛), 숙의(淑儀), 귀인(貴人), 숙빈(淑嬪)의 이력과 연잉군(延礽君)을 생산한 업적, 사제(私第)에서 사망한 과정 등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숙빈 최씨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일곱 살에 입궁하였다. 1681년(숙종 7)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을 때 12세의 나이로 인현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인현왕후를 섬기며 궁궐생활을 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자 모진 구박을 받았다.
그녀는 밤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기를 기도하였는데, 그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1693년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다. 그러나 영수는 2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 후의 영조)을 낳았다. 그해 숙의(淑儀)가 된 데 이어 1695년에는 귀인(貴人)에 오르고, 1699년 정1품 숙빈(淑嬪)에 봉해졌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에는 더욱 지극히 숙종을 섬겼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와 같은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따르면 영조의 아래로도 왕자가 있었으나 어렸을 때 죽었다고 한다. 1718년(숙종 44) 병이 위독해지자 장동 사제에서 요양하다가 경국 3월 9일 사망하였다. 숙종은 관판(棺板)과 제수(祭需)를 넉넉하게 보내도록 명하여 그 해 5월 12일, 양주에 예장하고 9월에 비석을 세웠다.
숙빈 최씨는 사후에도 국왕이 된 연잉군의 극진한 효도를 받았다. 영조는 즉위 초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묘(毓祥廟)를 경복궁 북쪽에 조성하였다. 이후 1753년(영조 29)에는 화경(和敬)의 시호를 추상하는 한편, 당시의 육상묘를 육상궁(毓祥宮)으로, 묘는 소녕원(昭寧園)으로 각각 격상하였다. 이 해는 숙빈 최씨가 숙종의 후궁으로 숙원에 봉해진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이때를 맞아 영조가 눈물을 삼키며 친히 글을 짓고 써 소녕원비(昭寧園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소녕원은 현재 사적 제 35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숙빈최씨와 관련한 금석문 자료는 이 자료 외에도 《숙빈최씨소녕묘비(淑嬪崔氏昭寧墓碑 )》, 《화경숙빈소녕원비(和敬淑嬪昭寧園碑)》, 《숙빈최씨소녕묘갈(淑嬪崔氏昭寧墓碣)》, 《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등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환국(換局)’으로 대변되는 숙종 대 정치상황과, 후궁에서 빈까지 이른 왕실여성의 삶을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들 영조에 의한 추숭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숙빈 최씨 관련 금석문을 일괄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御製』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京畿金石大觀』 경기도, 1982~199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