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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명릉지문(仁顯王后明陵誌文)

자료명 인현왕후명릉지문(仁顯王后明陵誌文) 저자 민씨(閔氏), 이순(李焞), 이여(李畬),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60-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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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 작성시기 1701
· 비고 2-5260-1, 2-5260-2
1701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민씨(閔氏) 1667 - 1701 조선 왕후
찬자-지문(誌文) 이순(李焞) 1661 - 1720 조선 왕족
찬자-후기(後記) 이여(李畬) 1645 - 1718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171.1/하170.8 X 상96.3/하96.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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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숙종(肅宗)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인 묘지문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인현왕후명릉지문(仁顯王后明陵誌文)
[내용 및 특징]
상․하로 나뉜 탁본은 지문(誌文)과 부기(附記)로 구성되어 있다. 상편에는 숙종이 친히 지은 지문이, 하편에는 지문의 일부와 이여(李畬, 1645~1718)가 지은 부기가 탁본되어 있다. 상하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옥색의 국화문 비단이고, 사양(四鑲)은 미색의 국화문 비단으로 표구하였으며, 옥축(玉軸)으로 마무리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며, 사양의 좌측에 약간의 좀구멍이 있고, 상단의 옥색 비단이 탈색되었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년 5월 15일(음력 4월 23일)~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는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1687)과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의 딸이다.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사망하여 불과 반달 만인 1681년(숙종 7)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1688년 후궁 장씨(張氏)가 아들 윤(昀, 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의 여파로 복위했다. 1700년(숙종 26)에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 1701년(숙종 27)에 사망했다. 1713년(숙종 39)년 존호 효경(孝敬), 1722년(경종 2) 휘호 의열정목(懿烈貞穆), 1753년(영조 29) 존호 숙정(淑聖), 1776년(영조 52) 존호 장순(莊純), 1890년(고종 27) 존호 원화(元化)가 각각 추상되었다.
숙종은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고양시 신도동 서오릉 내에 명릉을 조성하여 장사지냈다.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지문의 내용은 인현왕후의 생애와 업적, 개인적인 성품 등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숙종은 친히 행록(行錄)을 지어 내렸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기사년 뒤로 사제(師第)에 있을 때는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몸에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고, 찬 방에서의 잠자기를 피하지 않았으며, 여름날에도 점심을 들지 아니한 채 항상 말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은(聖恩)이 아닌 것이 없는데, 오히려 어떻게 감히 스스로 평인(平人)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갑술년 여름에 내가 긴 글을 지어 뉘우치는 뜻을 갖춰 보이고, 인하여 복어(服御)를 보냈으나 왕후가 겸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 편지글이 처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하게 하였다. 내가 또 글로써 간곡하게 고한 것이 세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받았다. 후에 다시 호위(壺位)에 돌아오자, 더욱 스스로 억제하고 두려워하면서 원량(元良) 이하를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 사랑하고 빈어(嬪御)를 거느림이 화평하고 은혜로우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기꺼이 복종하였다. 대저 투기와 성냄 같은 것은 마음에 싹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비록 이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숙종은 이 글에서 먼저 인현왕후가 사가(私家)로 쫒겨나 고생하던 때와 복위되어 궁궐로 돌아와 생활하던 때를 소상히 기술하여 그 어진 성품을 드러냈다.
이후 속종은 인현왕후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면서 탄식하였다. “이제 내가 지은 것을 사신(詞臣)이 지문을 찬술하는 자료로 삼고, 유택(幽宅)에 넣어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니, 감히 한 글자라도 실제에 지나친 것이 있어서 왕후가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을 어기겠는가? 아! 장수하고 단명함에 비록 명수(命數)가 있다지만, 왕후의 덕으로써 자식이 없고 수(壽)가 없으니, 어찌 그 이치가 이와 같이 상도(常道)에 어긋나는가? 이것이 내가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 슬프도다.”
인현왕후는 1681년(숙종 7)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왕자를 낳지 못한 반면 소의(昭儀) 장씨(張氏)는 후일 경종(景宗)으로 즉위하는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폐서인 되는 운명을 맞았다. 1689년(숙종 15) 왕자 윤의 원자 책봉과 관련하여 송시열 등 노론은 상소하여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노론을 축축하고 남인을 등용하였으며, 인현왕후 역시 희빈(禧嬪)으로 지위가 오른 장씨에 밀려 폐서인 되어 안국동 본댁인 감고당(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1694년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옥사가 일어나, 이를 저지하려돈 남인들은 유배가거나 사사되고 인현왕후는 복위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701년(숙종 27) 35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시법에 따라 의논하여 ‘인을 베풀고 의를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행실이 중외에 나타남을 현(顯)이라 한다’는 의미로 인현(仁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능호는 명릉(明陵), 전호(殿號)는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지문의 부기를 쓴 이여는 1680년(숙종 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청요직을 두로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인현왕후 복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이 지문을 지은 배경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장서각에는 《숙종대왕명릉지문(肅宗大王明陵誌文)》이 별도로 전하고 있어, 숙종과 인현왕후의 행적에 대한 묘도문자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 또한 영조가 인현왕후가 태어난 옛터에 세운 《인현왕후탄강구기비(仁顯王后誕降舊基碑)》가 소장되어 있다. 명릉은 현재 사적 제 19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인현왕후의 삶을 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금석문의 제작방식과 장황형식까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인조 대 까지는 왕비의 경우 왕과 차이를 두어 한편의 지석을 만든데 반해, 숙종 대에 이르면 왕비나 세자빈의 지석을 2판의 판석에 만든 사실을 인현왕후의 지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山陵都監儀軌』(장서각 2-2327, 2-2328)
『列聖誌狀通紀』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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