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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왕용잠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時別墅遺基碑)

자료명 인조대왕용잠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時別墅遺基碑) 저자 이종(李倧), 이순(李焞), 이항(李杭),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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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틀별시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 8-12)
· 작성시기 1695
· 비고 2-5250
169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종(李倧) 1595 - 1649 조선 왕족
찬자 이순(李焞) 1661 - 1720 조선 왕족
서자 이항(李杭) 미상 - 1701 조선 종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19 X 72.4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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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기거하던 별서(別墅)에 세운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조대왕용잠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時別墅遺基碑)
[내용 및 특징]
인조의 별서는 본래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 후에 元宗으로 추존)이 소유했던 터이다. 비의 소재지는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 8-12번지이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원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석은 1695년(숙종 21)에 숙종이 인조반정의 사적이 흐려짐을 염려하여 친히 비문을 지어 세우게 한 것이다. 족자의 장황은 흰색 종이를 대어 천리(天裏)와 지리(地裏), 사양(四鑲)의 구분 없이 꾸몄다. 아래에는 목축(木軸)을 달았는데, 이러한 장황 형식은 탁본을 한 당시가 아닌 후대에 다시 개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탁본은 본래 전면과 음기가 있었는데 현재 음기만이 현존한다. 현재 전하는 비석의 전면에는 ‘어필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御筆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라는 대자해서가 숙종어필로 씌여 있다. 음기의 서두에는 ‘어필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음기(御筆 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陰記)’라는 제목을 썼으며, 그 아래에는 글씨를 쓴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701)의 품계와 관직을 적었다. 이항은 왕실 인물로 인조의 손자이자 숭선군(崇善君) 징(徵)의 아들이다. 주청사로 청나라를 자주 왕래했으며,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희빈장씨가 사사된 1701년 기사옥(己巳獄)에 연루되어 절도에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 글씨는 그가 오위도총관으로 있을 때 쓴 것이다. 자획과 결구가 고르고 단정하여 석봉체(石峯體)의 영향이 짙은 17세기 대표적인 해서풍을 보여준다.
숙종이 지은 음기의 내용은 9행에 걸쳐 씌여 있다. 마지막 행에서는 ‘歲在乙亥之秋七月壬午謹識’라 새겨 지은 시기를 밝혔다. 비문의 내용에서는 인조의 별서가 소략한 규모이지만, 인조반정을 이룬 중흥지업(中興之業)의 상징적인 장소임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오래 지나 기둥과 초석만이 남고, 풀들이 무성할 만큼 황폐화되었음을 안타깝게 여겼으며, 여기에 비석을 세워 사적(事蹟)으로 삼고자 한 취지를 밝혔다.
당시는 광해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여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등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이에 정치를 바로잡고자 능양군으로 있던 인조는 서인 일파일 김람(金濫),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등과 더불어 이곳 별서에서 반정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장단부사 이서(李曙)와 이중노(李重老)의 군사가 이곳에서 합류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광해군을 축출함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 그런 만큼 인조의 별서는 반정의 계기를 마련한 상징적인 장소로서 의미가 부각되었으며, 인조반정의 성공을 기념하고 그 과정과 대의(大義)를 후세에 전하고자 한 것이 비를 세운 가장 큰 목적이었다.
한편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이곳은 본래 원종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경영한 곳으로 규모가 소략하고 순박함을 숭상하였는데, 검소함을 좋아한 인조대왕이 이곳을 넓히지 않았고, 세상 근심을 없애기 위해 거둥하던 장소였다고 씌여 있다. 특히 인조반정이 결의된 장소라는 점에서 ‘집이 변해 나라가 되었다’고 서술한 부분을 볼 수 있고, “우리 성조(聖祖)의 중흥지업이 실로 여기에서 터를 이루었으니 가히 해주(海州)의 부용당(芙蓉堂)에 비견할만하다.”고 하여 사적지로서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숙종은 문헌이 징험할 수 없음이 두렵고, 시대가 멀어질수록 기억이 없어져,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남아 있는 터를 감독하고 수리하여 담장을 두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돌에 새겨 기록하여 공적(功績)으로 전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이 별서에 대한 숙종의 관심은 각별했다. 또한 숙종은 비를 세운 다음 해, 익릉(翼陵)과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묘를 참배하고 오는 길에 이 별서의 비각 안에 자리잡고 앉게 되었다. 이때 그 아래에 심단(沈檀)이 무덤을 썼음을 알게 되자 무엄함을 꾸짖으며, 동서남북으로 5리, 또는 10리까지는 잡역을 줄이도록 하고, 수직인(守直人)을 정하여 지키도록 명한 것은 이 별서지에 대한 숙종의 관심을 보여준다.
비석은 화강암 재질로, 8각과 12각의 2중 기단 위에 놓여 있는 귀부(龜趺)는 구름무늬로 조각되어 있다. 거북머리는 험상궂은 형태로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낸 상태이며, 특히 눈 위를 두툼하게 장식하고 꽃무늬로 조각하였다. 비신 위에는 옥개형(屋蓋形) 뚜껑돌을 덮었다.
이 자료와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가 소장되어 있다. 인조가 출생한 황해도 해주에 세운 탄강구기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자료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해주에 머물던 인헌왕후(仁獻王后)가 인조를 출생한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적(史蹟碑的) 성격의 금석문이며, 1690년(숙종 16) 황해도관찰사 권환(權瑍)이 청하여 세운 것이다. 찬자(撰者)는 민암(閔黯)이며, 전서와 본문의 글씨는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별서지에 대한 사적화(史蹟化) 과정을 살필 수 있고, 조선 후기 정치상황에 따른 인조반정의 정당성 확보와 금석문의 건립과정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서울금석문대관』1 서울시 편, 198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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