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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청전비계영경비(穆淸殿丕啓靈慶碑)

자료명 목청전비계영경비(穆淸殿丕啓靈慶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권유(權愈), 이순(李焞), 이정(李㵾), 권규(權珪),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19-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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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황해도 개성시 (현재주소: 황해북도 개성 나성(羅城) 숭인문내(崇仁門內))
· 작성시기 1694
· 비고 2-5219-1, 2-5219-2
169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 조선 왕족
찬자-음기(陰記) 권유(權愈) 1633 - 1704 조선 문신
서자-전면(前面) 이순(李焞) 1661 - 1720 조선 왕족
서자-음기(陰記) 이정(李㵾) 1649 - 1708 조선 종실
전서자 권규(權珪) 1648 - 1722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전281.3/음기254.8 X 전111.7/음기96.3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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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개성(開城)의 옛 집인 목청전(穆淸殿)에 세워진 사적비(史蹟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목청전비계영경비(穆淸殿丕啓靈慶碑)
[내용 및 특징]
목청전은 경기도 개성시 운학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옛 집이다. 《목청전비계영경비(穆淸殿丕啓靈慶碑)》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사적비이자 사공비(事功碑)로, 숙종이 전면의 글씨를 쓰고, 권유(權愈)가 비문을 짓고, 이정(李瀞)이 음기를 글을 썼으며, 음기의 제액(題額)은 권규(權珪)가 썼다. 비문에 의하면 1418년(태종 18년) 태종은 옛 도읍지인 개성에 행행(行幸)하여 태조의 옛집을 수리하여 목청전이라 이름하고 태조의 영정(影幀)을 모셔놓도록 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목청전이 불타고 태조의 영정도 소진되어 없어졌으나, 효종 때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현종 때에는 나무를 심고 담장을 쌓아 봉금(封禁)하였다. 이 후 숙종 때에 와서 낭원군(朗原君) 이간(李侃)이 목청전을 수리하고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숙종이 친히 비액(碑額)에 “목청전비계영경지비(穆淸殿丕啓靈慶之碑)”라고 제(題)하였다고 한다.
태조가 승하한 이후 역대 조선의 국왕은 국가를 개창하고 초석을 다진 이성계의 옛 집을 정비하고 여러 추숭사업을 벌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그 사실들을 확인해 보면 우선, 1418년(태종 18) 태종은 개성에 행행(行幸)하여 목청전에 태조의 영정(影幀)을 모셔놓도록 하였고, 전직(殿直) 2인을 두었다. 이후 세종 때에 와서 좌참찬 하연(河演)과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를 개성에 보내 목청전을 살피게 한 뒤 그 기지(基地)를 고쳐서 꾸미도록 하였으며, 사섬시(司贍寺)의 종 4명과 개성부의 관노(官奴) 4명을 내렸다. 한편 역대의 국왕이 개성에 올 때면 목청전에 다례(茶禮)를 올리고 그 기념으로 문·무과의 과거를 치르기도 하였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목청전이 불타고 태조의 영정도 소진되어 없어지자 주춧돌만 남은 빈 터에는 잡초만이 우거져서 오랜 기간 쓸쓸하였다. 광해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재건을 꾀하였으나 전후복구사업 등 긴박한 일로 인해서 실행을 보지 못하고, 1694년(숙종 20) 숙종은 이곳에 행행하여 각(閣)을 중건하고 비(碑)를 세워 영구히 목청전이 있었던 곳임을 전하도록 하였다. 《목청전비계영경비(穆淸殿丕啓靈慶碑)》는 이때에 세운 것이다. 영조 또한 이곳에 행행하였고 해마다 개성부의 경력(經歷)을 집사(執事)로 임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나 정조 이후 제사를 폐지하였다.
장서각에 소장된 탁본은 전면과 음기로 나뉘어 있다. 전면은 ‘목청전비계영경지비(穆淸殿丕啓靈慶之碑)’라는 대자해서(大字楷書)가 씌여 있는데 숙종의 어필이다. 서체는 조맹부체를 기반으로 한 숙종의 유려한 해서체이다. 군데군데 행서의 운필을 섞어 유동성을 한층 배가시켰다. 숙종은 열성 가운데 조맹부체인 촉체(蜀體)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음기의 상단에는 ‘목청전비계영경지비명(穆淸殿丕啓靈慶之碑銘)’이라는 전서가 씌여 있는데, 전서의 서자는 권규(權珪)이다. 권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1675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때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697년 풀려났고, 1721년에는 연잉군(延仍君)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임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723년 사망하였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서에 뛰어났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를 인용하여 전서를 잘 썼다고 기록하였다. 『숙종실록』에서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비문과 전서를 쓸 사람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숙종이 ‘누가 전서를 잘하느냐?’고 묻자 오시복(吳始復)이 ‘이서우(李瑞雨)와 권규가 다 전서에 능하다.’고 하였고, 숙종은 권규를 지명하였다. 그가 쓴 주요 금석문으로 《장경신도비(張烱神道碑)》, 《권대임신도비(權大任神道碑)》, 《박대립신도비(朴大立神道碑)》, 《통도사사리탑비(通度寺舍利塔碑)》, 《선암사중수비(仙巖寺重修碑)》 등의 전액을 남겼다. 권규는 특히 미수전(眉叟篆)을 잘 쓴 사람이다. 허목의 문인으로 평생 미수전을 따라 썼다. 이 비문의 전서도 소전의 필획과 미수의 대전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글씨이다.
이 자료와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경덕궁비계영경비(敬德宮丕啓靈慶碑)》가 소장되어 있다. 경덕궁은 태조 이성계의 사저이다. 1694년(숙종 20)에 세운 사적비로, 전면의 글씨와 시는 숙종의 어제어필이다. 음기의 찬자(撰者)는 권유(權愈), 음기의 두전(頭篆)은 권규(權珪)가, 음기의 서(序)와 명(銘)은 모두 오시복(吳始復)이 썼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탄생지에 대한 사적화(史蹟化) 과정을 살필 수 있고, 촉체로 대변되는 숙종의 어필과 미수전의 계승자 권규의 전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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