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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자료명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저자 이종(李倧), 민암(閔黯), 이진휴(李震休), 이진휴(李震休),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4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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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황해도 해주시 (현재주소: 황해도 해주군 해서면 남본리)
· 작성시기 1325
· 비고 2-5247
1325년(건립)/1613년(중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종(李倧) 1595 - 1649 조선 왕족
찬자 민암(閔黯) 1636 - 1694 조선 문신
서자 이진휴(李震休) 1657 - 1710 조선 문신
전서자 이진휴(李震休) 1657 - 1710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14.5 X 160.6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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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 1595~1649)의 출생지 해주(海州)에 세운 탄강구기비(誕降舊基碑)의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6대 국왕 인조가 출생한 황해도 해주에 세운 탄강구기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자료이다.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해주에 머물던 인헌왕후(仁獻王后)가 인조를 출생한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적(史蹟碑的) 성격의 금석문이며, 1690년(숙종 16) 황해도관찰사 권환(權瑍)이 청하여 세운 것이다. 찬자(撰者)는 민암(閔黯)이며, 전서와 본문의 글씨는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비석의 전면과 음기가 하나의 축으로 장황되었으며, 전면에 해당하는 대자전서(大字篆書)를 잘라 음기의 앞부분에 오려붙여 합본하였다. 전면의 전서는 “仁祖大王誕降舊基碑”의 9자이며, 음기는 19행의 내용을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부분적으로 비단이 마멸된 부분과 좀구멍이 있지만, 자획이 뚜렷하며, 먹색을 입힌 상태도 좋은 편이다.
족자의 장황은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남색 비단을 대었으며, 문양은 국화문양을 도식화하여 직조하였는데, 섬세하고 우아한 장식효과를 준다.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도 국화문이 들어간 미색 비단인 백릉(白綾)을 대어 표구하였다. 천리에는 좌우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역시 미색 비단으로 풍대(風帶)를 부착하였으며,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다. 목축(木軸) 좌우의 막지(莫只)에는 둥글게 깎은 옥을 부착하였으며,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에는 지리의 비단으로 감아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음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康熙. 十九年五月 日立’이라는 건립시기를 기록하였다. 여기에 박락된 글자는 ‘二’자로 파악된다. 이 탁본의 원비는 1690년 세워진 것이며, 탁본시기도 이즈음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인조가 해주에서 탄생한 사실과 인헌왕후의 태몽 이야기, 그리고 이곳을 사적화(史蹟化) 하여 비를 세우게 된 과정 및 인조의 탄생을 송축하는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난길에 오른 뒤 전세가 회복되자 거마(車馬)를 서울로 향하였다. 그 와중이던 1595년(선조 28) 8월에는 해주에서 얼마간을 머물렀다. 왕비와 여러 비빈, 그리고 왕자들도 여기에 함께 체류하였는데, 이때 원종(元宗)의 비인 인헌왕후가 인조를 출산하였다. 이를 기념한 이 비석은 인조의 탄생으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1690년에 인조의 사적을 현양하기 위해 해주에 새운 것이다.
인조가 출생할 때 인헌왕후의 어머니임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가 꾼 태몽 또한 이 터를 더욱 기념하게 하는 일화로 전한다. 인헌왕후가 산기가 있을 때, 홀연히 붉은 빛이 밝게 빛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 찼다. 이때 부부인 신씨가 옆에서 졸다가 꿈에 붉은 용이 모후(母后) 옆에 있는 것을 보았고, 또한 병풍에 ‘귀자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이라 써진 글씨를 보았다. 이에 부부인이 깨어나 보니 이미 아기가 탄생해 있었는데, 이가 바로 인조라는 것이다.
인조가 탄생한 해주의 옛 터는 이후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인조 사후 15년이 지난 1665년(현종 6)부터 이곳을 사적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목사(牧使)인 홍석기(洪錫箕)가 1665년 구지(舊址)를 찾고서 그 땅을 사들여 담장을 둘렀으며, 1668년(숙종 14) 관찰사 김구(金構)가 세월이 오래되어 민멸될 것을 염려하여 축대를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 또한 1690년(숙종 16)에는 관찰사 권환이 대 위에 비석을 세울 것을 주청하여 비를 건립하였다. 이것인 1690년에 이 비가 세워지게 된 과정이다. 이와 같이 국왕의 탄강구기비를 세운 경우는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왕이 탄생한 터는 주요 사적지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적의 사실을 문자로 징험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김과 동시에 백성들에게 공경과 흠모의 마음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다.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 「봉모당합내외봉장품목록(奉謨堂閤內外奉藏品目錄)」에는 《인조탄강구기비족자(仁祖誕降舊基碑簇子)》 1점이 보여 왕실에도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문을 지은 민암(閔黯)은 남인 관료로서 정치적인 부침을 겪은 끝에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사사되었다. 이후 서인들이 집권한 뒤 민암은 역신으로 지목되어 그가 지은 이 비석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결국 1720년에 경종(景宗)의 명으로 이관명(李觀命)이 새로 지은 구기비가 같은 장소에 세워졌다. 이때 민암이 지은 1690년의 비는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조선금석총람』에는 1720년에 세운 구기비의 소재지가 황해도(黃海道) 해주군(海州郡) 해서면(海西面) 남본정(南本町)으로 되어있지만, 1690년에 세운 비에 대해서는 존재 유무나 소재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따라서 민암이 지은 비는 1720년의 새로운 비가 세워지면서 파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탁본은 유일본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탄생지에 대한 사적화(史蹟化) 과정을 살필 수 있고, 후대 정치적 상황에 따른 금석문의 개립(改立)과 파손과정을 읽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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