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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휘릉지문(莊烈王后徽陵誌文)

자료명 장렬왕후휘릉지문(莊烈王后徽陵誌文) 저자 조씨(趙氏), 이단하(李端夏),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3-1=2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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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작성시기 1688
· 비고 2-5253-1=2, 2-5253-2
1688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조씨(趙氏) 1624 - 1688 조선 왕후
찬자 이단하(李端夏) 1625 - 1689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전139.8/음기175.0 X 전93.0/음기92.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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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의 묘지석(墓誌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장렬왕후휘릉지문(莊烈王后徽陵誌文)
[내용 및 특징]
장렬왕후의 휘릉은 1688년(숙종 14) 단릉(單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소재지는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이다.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장렬왕후휘릉지문》은 1688년(숙종 14)에 장렬왕후가 승하하고 능을 조성면서 지석을 제작하여 탁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장렬왕후휘릉지문》은 상․하 2점으로 나누어 장황되었다. 탁면에는 상․하 모두 24행의 내용을 해서로 써서 새겼다. 탁면과 장황의 상태는 양호하며, 자획의 윤곽도 선명하고 먹색도 고르게 입혀졌다. 현재 장서각에는 상2점(2-5253-1, 2-5253-1=2)과 하1점(2-5253-2) 등 3점의 《장렬왕후휘릉지문》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청구기호 2-5253-1과 2-5253-2는 장황형식이 같아 상․하 한 짝으로 탁본하여 첩으로 꾸몄음을 알 수 있다.
족자의 장황은 상․하 모두 아래 윗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남색 비단을 대었다. 문양은 격자문의 바탕 위에 타원형의 화문(花紋)을 동일 간격으로 배치하여 장식 효과를 높였다. 격자문과 화문은 숙종 대에 제작된 족자의 비단 가운데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예로써, 당시의 우수한 직조기술을 가늠케 한다. 탁면과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 비단인 백능(白綾)을 대었으며, 여기에도 조밀한 화문을 직조하여 고급스러운 색감을 내었다. 천리에는 좌우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미색 비단으로 된 풍대(風帶)를 부착하였다. 족자의 하단에는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는데, 목축(木軸) 좌우의 막지(莫只)에는 둥글게 깎은 옥을 부착하였다.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는 지리의 비단으로 감아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인조장렬후]국장도감도청의궤([仁祖莊烈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4867)에 의하면 지석은 2편으로 만들었으며, 봉상시 관원 1명을 감조관(監造官)으로 하여 전례에 따라 지석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글자를 새긴 지석은 묵본(墨本)으로 인출하고 족자로 장황하여 양전(兩殿)에 진상하는 외에 총호사(摠護使) 이하 담당 방(房)의 관원들에게도 각각 분아(分兒)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탁본하여 장황한 지문은 국장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되새기게 하는 기록물이자 주요 역사에 참여하였다는 기념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의 「봉모당합내외봉장품목록(奉謨堂閤內外奉藏品目錄)」에는 《장렬왕후지문비족자(莊烈王后誌文碑簇子)》상․하 각 1점과 《휘릉지문족자(徽陵誌文簇子)》 1점이 소장되었던 기록이 있다. 한편 장렬왕후 휘릉의 지문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수록되어 있다.
지문에는 신민(臣民) 간에 덕망이 높았던 장렬왕후가 병골를 겪다가 승하하게 됨과, 간병에 힘쓴 숙종의 극진한 효행을 기록하였다. 이어 장렬왕후 조씨의 가계에 대한 기록과 어머니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의 태몽 이야기, 그리고 유년기의 품행이 적혀있다. 또한 가례 이후에도 근검과 조신한 몸가짐이 한결같았고, 백성들의 진휼에 관심이 많았으며, 풍정(豊呈)과 진연(進宴) 등을 즐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성조(聖朝)의 배필이 되었던 그녀의 덕행과 그 은덕이 신민에 미쳤음을 축원하는 내용을 기술하였다.
장렬왕후의 본관 양주(楊州), 성 조(趙), 창원(昌遠)의 딸이다.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1651년 자의(恣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服喪)문제로 서인·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1674년(현종 15)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 이처럼 장렬왕후는 비록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복제 예송의 발단이 됨으로써 조선 중기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661년(현종 2) 공신(恭愼)의 존호가 추가되었고, 후에 휘헌(徽獻)·강인(康仁) 등의 존호가 가상되었다.
지문을 지운 이단하(李端夏, 1625~1689)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계주(季周), 호는 외재(畏齋)다. 166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이후 정헌(正獻), 헌납(獻納) 등의 관직을 시작으로 만년에는 좌의정을 지냈다. 당색은 서인으로 송시열의 문인이며, 조선 후기 경학을 대표할만한 학자이다. 문장에 뛰어나 여러 문사들의 신도비와 묘갈을 쓰기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장렬왕후의 전기에 해당하는 내용을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글씨 및 각자(刻字)에서 볼 수 있는 높은 격조와 수준, 그리고 장황의 미감이 돋보이는 17세기 왕실 금석문의 특색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徽陵誌』(장서각 2-4505)
『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505)
『莊烈王后國恤謄錄』(장서각 2-3005)
『[仁祖莊烈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4867)
『畏齋集』 李端夏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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