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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숭릉지문(明聖王后崇陵誌文)

자료명 명성왕후숭릉지문(明聖王后崇陵誌文) 저자 김씨(金氏), 송시열(宋時烈),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7-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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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작성시기 1684
· 비고 2-5257-1, 2-5257-2
168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김씨(金氏) 1642 - 1683 조선 왕후
찬자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187.8/하172.3 X 상96.0/하95.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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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제 18대 국왕 현종(顯宗)을 숭릉(崇陵)에 정비(正妃)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안장할 때 제작한 지석(誌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명성왕후숭릉지문(明聖王后崇陵誌文)
[내용 및 특징]
숭릉은 사적 제 193호인 동구릉(東九陵)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동원쌍릉(同原雙陵)으로 조성되어 있다.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명성왕후숭릉지문》은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이듬해 합봉하면서 지석을 제작하여 탁본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명성왕후숭릉지문》은 상․하 각 1점씩 모두 2점이 족자 형태로 남아 있다. 2점 모두 탁면에 오금을 먹였으며,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고,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청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천리, 지리 사양의 비단에는 모두 국화(菊花)․격자문양(格子紋樣)이 직조되어 있다. 천리에 미색 비단으로 마들어 붙인 풍대(風帶)가 2줄 있고, 축두(軸頭)는 옥(玉)으로 만들어 끼웠다.
《명성왕후숭릉지문》의 서자(書者)는 확인할 수 없지만 왕희지체를 근간으로 단아한 해서로 씌여 있다. 내용은 명성왕후 김씨의 선조가 신라왕손(新羅王孫)으로부터 시작되어 조선왕조에 왕서 명문가로 자리 잡은 내력과 조(祖)․부(父)의 관직 및 이름을 밝혔다. 명성왕후의 탄생과 성품, 승하할 때까지 왕후로서의 삶의 역정과 그에 대한 칭송 등을 담고 있다. 찬자(撰者)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典)』권 181과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권 19에 실려 있다.
명성왕후의 지문은 본래 1684년(숙종 10) 송시열이 찬진(撰進)하였으나,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된 뒤 민암(閔黯)이 개찬(改撰)하였다고 한다. 본 자료는 송시열이 지은 것이고, 《인경왕후(仁敬王后)․명성왕후(明聖王后)개수지문(改修誌文)》(규장각 13207)과 《명성왕후지문(明聖王后誌文)》(규장각 9820)에는 민암이 지은 지문이 실려 있다.
피전자 명성왕후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청풍부원군 김좌명(金佐明)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에 한양의 장통방(長通坊)에서 탄생하여 1651년(효종 2)에 어의궁(於義宮)에서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너그러운 모습과 곧은 성품으로 효종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나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조정의 정무에까지 관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슬하에 숙종, 명선(明善)․명안(明安)공주 등 1남 3녀를 두었고, 1683(숙종 9)에 창경궁에서 춘추 42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찬자 송시열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이다. 예학과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비(碑), 갈(碣), 지문(誌文) 등 비지류(碑誌類)를 잘 짓는다고 알려져 청탁으로 지은 것이 수 백편에 이르렀다. 조선 중기 ‘우암찬(尤庵撰) 동춘필(同春筆), 청음전(淸陰篆)’이라 하여 송시열의 문장, 송준길의 글씨, 김상헌의 두전으로 조성된 석비가 세간에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숭릉의 능제(陵制) 및 관련 규례에 대해서는 『崇陵誌』(장서각 2-4449)를 참조할 수 있다. 현종이 승하하여 숭릉을 조성할 때의 여러 과정은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규장각 15076)를 참조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명성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7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조선의 왕릉』 이호일 가람기획, 2003.
『朝鮮王陵石物誌』 殷光俊 민속원, 1985.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宋子大典』 宋時烈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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