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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대왕숭릉[합부]비(顯宗大王崇陵[合祔]碑)

자료명 현종대왕숭릉[합부]비(顯宗大王崇陵[合祔]碑) 저자 이연(李棩), 김씨(金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명성왕후숭릉지문(明聖王后崇陵誌文) 저자(이칭) 김씨(金氏)|송시열(宋時烈)|미상|미상
청구기호 K2-525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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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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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작성시기 1684
· 비고 2-5255-1, 2-5255-2
168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연(李棩) 1641 - 1674 조선 왕족
피전자 김씨(金氏) 1642 - 1683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29.5/음기230.0 X 전88.2/음기88.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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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제 18대 국왕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정비(正妃) 명성왕후(明聖王后)가 합봉될 때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현종대왕숭릉[합부]비(顯宗大王崇陵[合祔]碑)
[내용 및 특징]
현종의 숭릉은 사적 제 193호인 동구릉(東九陵)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동원쌍릉(同原雙陵)으로 조성되어 있다. 숭릉은 1674년(숙종 즉위)에 조성하였으며, 이후 1683년(숙종 9)에 정비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이듬해 합봉(合封)하였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현종대왕숭릉합봉비》는 전면 1점과 음기 1점이 족자 형태로 남아 있다. 두 점 모두 탁면에 오금(烏金)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다.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청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천리에 미색 비단으로 만든 풍대가 두 줄 있다. 천리, 지리, 사양의 비단에는 모두 모란당초문(牧丹唐草紋)이 직조되어 있다. 축두(軸頭)는 나무로 만들었다. 두 점 모두 배접이 들뜬 부분이 있으며, 전면 족자의 천리가 매우 닳아 있다.
전면에는 소전체로 “朝鮮國/顯宗大王崇陵/明聖王后祔左”라 새겼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현종과 명성왕후의 약력을 새겼다. 현종에 대해서는 탄생, 즉위, 승하, 장례의 시기와 장지(葬地), 재위기간과 향년을 기재하였다. 명성왕후에 대해서는 탄생, 세자빈책봉, 왕비진봉과 승하, 장례의 시기와 장자, 향년을 기재하였다. 음기 말밀에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히지 않은 점이 다른 왕릉 표석과는 다르다. 이 비석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실려 있다. 찬자와 서자, 전서자는 모두 미상이다.
이 비석과 관련하여 장석각에는 《현종대왕숭릉지문》이 소장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지문의 내용은 크게 현종의 탄생과 성장과정 및 특이한 기질, 인군(人君)으로서의 지혜롭고 인애한 성품과 부모에 대한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 구성되었다. 부왕 효종에 대한 일화는 1659년(효종 10)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새보(璽寶)를 받고 왕위에 올랐는데, 돌아와서는 여차(廬次)에서 수질과 요질을 띠고 애곡(哀哭)을 그치지 않았으며 죽도 들지 않고 전 올리는 일도 대신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매우 더운 여름이었는데도 비좁은 곳에 거처하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아 좌우의 신하와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독실한 효성에 감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모후(母后)에 대한 일화는 1674년(현종 15) 봄에 모후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급히 명하여 기제(祈祭)를 두루 거행하게 하고 또 원통한 죄수들을 평의하여 석방하게 하였던 일, 모비의 상을 당하자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너무 슬퍼하였고, 제사를 더욱 정결히 하여 제수(祭需)를 익히고 씻는 일에서부터 신칙하고 간검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보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및 국왕으로서 백성을 위한 시책 등을 자세히 기재하였다. 이 지문은 『현종실록』에 현종의 행장과 함께 실려 있고,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와 찬자 김석주의 시문집인 『식암유고(息庵遺稿)』에도 실려 있다.
피전자 현종의 자는 경직(景直), 휘(諱)는 연(棩)으로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고 비는 돈령부영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병자호란 후 아버지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이 볼모로 가 있던 심양[瀋陽]에서 출생하였다. 1644년(인조22) 귀국하여 1649년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그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1659년(효종 10) 즉위 뒤 효종의 상례(喪禮)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이 주장하는 3년설을 물리치고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집권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인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유임시킴으로써 남인 재기의 바탕이 마련되던 중, 1674년(현종 15)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하여 대공설(大功說: 9개월설)을 주장한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서인이 온갖 방법으로 재기를 꾀함으로써, 그의 재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다.
재위기간 동안 여러 국책사업을 실시하였는데, 함경도 산악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하였고, 1660년(현종 1)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시켰으며, 1662년 호남의 산군(山郡)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다음해 경기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1668년 김좌명(金佐明)에게 명하여 동철활자(銅鐵活字) 10만여 자를 주조시켰고, 다음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하고, 병비(兵備)에 유의하여 어영병제(御營兵制)에 의한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피전자 명성왕후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청풍부원군 김좌명(金佐明)의 딸이다. 1642년(인조 20)에 한양의 장통방(長通坊)에서 탄생하여 1651년(효종 2)에 어의궁(於義宮)에서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너그러운 모습과 곧은 성품으로 효종의 사랑을 받기도 했으나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조정의 정무에까지 관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명성왕후는 슬하에 숙종, 명선(明善)․명안(明安)공주 등 1남 3녀를 두었고, 1683(숙종 9)에 창경궁에서 춘추 42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숭릉의 능제(陵制) 및 관련 규례에 대해서는 『崇陵誌』(장서각 2-4449)를 참조할 수 있다. 현종이 승하하여 숭릉을 조성할 때의 여러 과정은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규장각 15076)를 참조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현종과 명성왕후의 합봉 사실을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17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朝鮮王陵石物誌』 殷光俊 민속원, 1985.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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