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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왕후영릉지문(仁宣王后寧陵誌文)

자료명 인선왕후영릉지문(仁宣王后寧陵誌文) 저자 장씨(張氏), 김수항(金壽恒), 심익현(沈益顯),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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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여주군 (현재주소: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 83-1)
· 작성시기 1674
· 비고 2-5254-1, 2-5254-2
167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장씨(張氏) 1618 - 1674 조선 왕후
찬자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 조선 문신
서자 심익현(沈益顯) 1641 - 1683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186.0/하184.8 X 상84.3/하84.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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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에 정비(正妃)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안장할 때 제작한 지석(誌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선왕후영릉지문(仁宣王后寧陵誌文)
[내용 및 특징]
영릉은 효종과 인선왕후가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형태로 안장되어 있다. 현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안장된 영릉(永陵)이 근방에 있어, 두 능이 함께 사적 제 195호로 지정되었다.
효종의 능은 원래 양주(楊州) 건원릉(健元陵) 서쪽 산줄기에 병풍석(屛風石)을 갖춘 왕릉으로 조영되었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는 여론으로 천릉(遷陵) 계획을 갖고서 여주 영릉 옆에 안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릉을 열어 보니 깨끗하여 의론이 분분했고, 이것이 당론으로까지 번져 시끄럽게 되어 영릉도감의 담당자들이 면직되기도 하였다. 결국 현재의 자리로 옮긴 다음해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에 정해졌고,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현재와 같이 앞뒤로 나란히 상릉(雙陵)을 이루게 되었다.
인선왕후영릉지문은 1674년(현종 15)에 김수항(金壽恒)이 찬진(撰進)하였다. 처음에는 송시열(宋時烈)에게 맡겼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어 김수항에게 찬서(撰書)를 모두 명하였으나 일이 힘들 것을 염려하여 다시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을 서사관으로 삼았다.
인선왕후영릉지문은 모두 해서로 씌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다. 인선왕후의 선조(先祖)가 원나라 때 선무장군진변총관(宣武將軍鎭邊摠管)으로서 고려에 왔다가 벼슬에 나아가 고관(高官)이 되었다는 사실을 비롯한 가계의 내력과 왕후의 탄생과 성장배경 및 간택과정, 간택된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따라 인질로서 심양(瀋陽)에 간 일, 그리고 왕후로서의 성품과 역할, 사후 왕후에 대한 시호(諡號)와 휘호(徽號)의 제정 및 효종의 천장(遷葬) 문제와 왕후의 부좌(祔左) 사실, 아울러 왕후 소생 자녀들의 출가여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문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와 『문곡집(文谷集)』에 실려 있다.
인선왕후는 1631년 봉림대군(鳳林大君)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심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와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던 인선왕후는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의 색을 적색과 청색의 두 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재원은 모두 북벌 계획에 사용되었다.
이후 1659년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재위 10년 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다. 아들 현종이 즉위한 후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으로는 현종과 6명의 공주를 두었다. 1674년(현종 15) 57세로 사망하였다.
찬자 김수항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시문에 뛰어났고, 변려문(騈儷文)에서는 당대의 제일인자로 손꼽혔다. 또한 가풍을 이은 필법이 단아해 전서와 해서·초서에 모두 능하였다. 절의로 이름 높던 김상헌의 손자로 가학(家學)을 계승했으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인 송시열·송준길(宋浚吉)과 종유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가장 아끼던 후배로서 한 때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할 때 송시열을 옹호하고 외척과 가까운 노론의 영수가 되자, 소론 명류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서자 심익현은 본관이 청송(靑松), 자는 가회(可晦), 호는 죽오(竹塢)이다. 영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아들이다. 10세 때에 효종의 부마로 뽑혀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청평위(靑平尉)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나서 각종 산릉지(山陵志), 옥책문(玉冊文), 교명(敎命) 등을 많이 썼는데, 특히 조맹부의 촉체(蜀體)에 뛰어났다. 그의 글씨로 남아 있는 금석문은 《우의정장유비(右議政張維碑)》, 《영의정이경흥비(領議政李敬興碑)》, 《경림군이정표(慶林君李淀表)》, 《인경왕후익릉표(仁敬王后翼陵表)》, 《효종영릉표(孝宗寧陵表)》, 《좌승지송시철비(左承旨宋時喆碑)》 등이 있다.
[자료적 가치]
인선왕후의 삶을 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금석문의 제작방식과 장황형식까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숙종 대에 이르면 왕비나 세자빈의 지석은 2판의 판석에 만든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전에는 왕비의 경우 왕과 차이를 두어 한 편으로만 제작하여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朝鮮王陵石物誌』 殷光俊 민속원, 1985.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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