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현종대왕숭릉지문(顯宗大王崇陵誌文)

자료명 현종대왕숭릉지문(顯宗大王崇陵誌文) 저자 이연(李棩), 김석주(金錫冑),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6-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작성시기 1674
· 비고 2-5256-1, 2-5256-2
1674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연(李棩) 1641 - 1674 조선 왕족
찬자 김석주(金錫冑) 1634 - 1684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228.3/하229.0 X 상124.2/하124.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조선 제 18대 국왕 현종(顯宗)을 숭릉(崇陵)에 안장할 때 제작한 지석(誌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현종대왕숭릉지문(顯宗大王崇陵誌文)
[내용 및 특징]
현종의 숭릉은 사적 제 193호인 동구릉(東九陵)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동원쌍릉(同原雙陵)으로 조성되어 있다.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현종대왕숭릉지문은 1674년(숙종 즉위)에 숭릉을 조성하며 제작하여 탁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683년(숙종 9)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승하하자 이듬해 합봉(合封)하였다.
현종대왕숭릉지문 또한 숭릉이 조성된 해에 김석주(金錫冑)에 의해 찬진(撰進)되었다. 본래 송시열(宋時烈)에게 찬술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당시 송시열이 복제논쟁으로 현종에게 죄를 입었으므로 지문을 짓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숙종이 다시 김만기(金萬基)에게 맡기고자 하였으나, 김수항(金壽恒)이 이단하(李端夏)와 김석주를 천거하여 김석주가 낙점을 받았다. 지문의 글씨를 쓴 사람은 확인할 수 없지만 왕희지체를 골격으로 한 단아한 해서풍이 돋보인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이 지문은 상․하 각 1점씩 모두 2점이 족자 형태로 남아 있다. 2점 모두 탁면에 오금(烏金)을 먹였으며, 백색의 무늬 없는 종이로 천리(天裏), 지리(地裏), 사양(四鑲)을 만들었다. 연하늘색 종이를 표구지 안쪽에 덧대어 천리, 지리와 사양을 구분하였다. 풍대(風帶)는 없고, 축두(軸頭)는 옥으로 만들어 끼웠다. 두 점 모두 탁면 상단에 표구하기 이전에 입은 손상이 남아있다.
지문의 내용은 크게 현종의 탄생과 성장과정 및 특이한 기질, 인군(人君)으로서의 지혜롭고 인애한 성품과 부모에 대한 효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 구성되었다. 부왕 효종에 대한 일화는 1659년(효종 10) 5월에 효종이 승하하자, 새보(璽寶)를 받고 왕위에 올랐는데, 돌아와서는 여차(廬次)에서 수질과 요질을 띠고 애곡(哀哭)을 그치지 않았으며 죽도 들지 않고 전 올리는 일도 대신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매우 더운 여름이었는데도 비좁은 곳에 거처하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아 좌우의 신하와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독실한 효성에 감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모후(母后)에 대한 일화는 1674년(현종 15) 봄에 모후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급히 명하여 기제(祈祭)를 두루 거행하게 하고 또 원통한 죄수들을 평의하여 석방하게 하였던 일, 모비의 상을 당하자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너무 슬퍼하였고, 제사를 더욱 정결히 하여 제수(祭需)를 익히고 씻는 일에서부터 신칙하고 간검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보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 및 국왕으로서 백성을 위한 시책 등을 자세히 기재하였다. 이 지문은 『현종실록』에 현종의 행장과 함께 실려 있고,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와 찬자 김석주의 시문집인 『식암유고(息庵遺稿)』에도 실려 있다.
피전자 현종의 자는 경직(景直), 휘(諱)는 연(棩)으로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고 비는 돈령부영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병자호란 후 아버지 봉림대군(鳳林大君: 孝宗)이 볼모로 가 있던 심양[瀋陽]에서 출생하였다. 1644년(인조22) 귀국하여 1649년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그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세자가 되었다.
1659년(효종 10) 즉위 뒤 효종의 상례(喪禮)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이 주장하는 3년설을 물리치고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집권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인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유임시킴으로써 남인 재기의 바탕이 마련되던 중, 1674년(현종 15)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를 채택하여 대공설(大功說: 9개월설)을 주장한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서인이 온갖 방법으로 재기를 꾀함으로써, 그의 재위 중에 남인과 서인의 당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쇠퇴해졌다.
재위기간 동안 여러 국책사업을 실시하였는데, 함경도 산악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하였고, 1660년(현종 1) 두만강 일대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시켰으며, 1662년 호남의 산군(山郡)에도 대동법(大同法)을 실시, 다음해 경기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였다. 1668년 김좌명(金佐明)에게 명하여 동철활자(銅鐵活字) 10만여 자를 주조시켰고, 다음해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하고, 병비(兵備)에 유의하여 어영병제(御營兵制)에 의한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찬자 김석주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이다. 그는 1674년(숙종 원)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 등을 몰아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는 송시열을 대신하여 숭릉지문의 찬술자로 낙점받을 수 있었다.
숭릉의 능제(陵制) 및 관련 규례에 대해서는 『崇陵誌』(장서각 2-4449)를 참조할 수 있다. 현종이 승하하여 숭릉을 조성할 때의 여러 과정은 『현종숭릉산릉도감의궤(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규장각 15076)를 참조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현종의 생애와 업적을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7세기 중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朝鮮王陵石物誌』 殷光俊 민속원, 1985.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