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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열왕후장릉지문(仁烈王后長陵誌文)

자료명 인열왕후장릉지문(仁烈王后長陵誌文) 저자 한씨(韓氏), 장유(張維),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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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 작성시기 1636
· 비고 2-5251
1636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한씨(韓氏) 1594 - 1635 조선 왕후
찬자 장유(張維) 1587 - 1638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195.8 X 102.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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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의 비(妃)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1594~1635)의 묘지문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인열왕후장릉지문(仁烈王后長陵誌文)
[내용 및 특징]
지문(誌文)은 사자(死者)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의 글로서, 판석(板石)인 지석(誌石)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으며, 매립한 이후에는 탁본이 불가능하므로 그 직전에 일반적으로 인출(印出)하였다. 따라서 지문을 탁본한 시기는 대부분 능을 조성한 시점과 일치한다.
인열왕후장릉지문 또한 인열왕후가 파주(坡州)의 운천리(雲川里)에 안장(安葬)될 때 매립한 것으로, 이 지문의 탁본연도는 장례가 있었던 1636년(인조 13)이 된다. 이 지문은 하나의 판석(板石)에 새긴 것으로, 탁면의 내용은 모두 26행으로 이루어졌다. 탁면과 장황은 양호한 상태이며, 자획의 윤곽이 분명하고 먹색도 고르게 입혀져 있다. 현재 장서각에는 청구기호 2-5251 한 점만이 소장되어 있다.
인열왕후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성은 한씨이다. 아버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과 어머니 황씨(黃氏)사이에서 1594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하였다. 1610년 17세의 나이에 능양군(陵陽君: 인조)과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다. 1623년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이 됨에 따라 한씨 나이 30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후일의 효종(孝宗)인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을 낳았다. 서인 세력이 득세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간택조차 조정의 뜻에 따라야 하는 근심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인열왕후는 이후 1635년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1651년(효종 2) 휘호(徽號)를 ‘명덕정순(明德貞順)’으로 추상하였다. 시호(諡號)는 ‘명덕정순인렬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인데, 인열의 ‘인(仁)’은 어짐을 베풀고 의(義)를 따르는 것, 그리고 ‘열(烈)’은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뜻한다. 능호(陵號)는 장릉(長陵)으로 파주 운천리에 조성되었다.
인열왕후에 대한 인조의 애정은 각별하였다. 인조가 국장도감에 내린 하교문에는 후덕한 인품과 어진 행실을 열거하였고, 이른 나이에 인열왕후를 떠나보내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내용이 『인조실록』에 보인다. 인열왕후가 살았던 행적과 삶의 주요 국면들은 장유(張維)가 지은 지문(誌文)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지문의 서두에서는 가문의 계보를 기술하였고, 유년시절에 남달리 총명했던 품행과 혼례 후 잠저(潛邸)에서 시부모를 모심에 극진한 정성을 다하였음을 적어두었다. 또한 인조반정 과정에서의 조력과 국모로서의 위의(威儀)와 은덕(恩德)을 갖추었음을 기록하였다. 특히 인효(仁孝)한 덕성으로 왕을 섬김과 내외를 구분하는 엄격함, 그리고 아랫사람을 가르침과 자녀를 양육함에 현철(賢哲)한 후비(后妃)였음을 강조하였다. 지문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수록되어 있다.
지문을 쓴 장유(張維)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운익(雲翼)의 아들이자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양명학을 익혀 기일원론을 취하였으며, 수양의 방법으로 성리학의 거경(居敬)이 아니라 정일(精一)을 내세웠다. 문장이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사대가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철학적 규범에 대한 문학의 독자성과 순수성을 옹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인열왕후의 지문은 장유가 판서로 있던 50세에 지은 것이다.
본래 지문에는 찬자(撰者)의 서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열성지장통기』를 통해 확인하였다. 글씨를 쓴 서자(書者)의 서명 또한 기재되어 있지 않다. 서체는 왕희지체를 본받은 엄정한 해서(楷書)이다.
족자의 장황형식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석류문이 있는 남색 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 비단을 대었다. 여기에도 동일한 석류문이 직조되어 있다. 천리에는 좌우의 폭을 3등분한 자리에 미색 비단으로 풍대(風帶) 두 가닥을 부착하였다. 남색 비단과 사양의 석류문은 매우 섬세하며, 규칙적인 형태가 반복되도록 도안하였다. 족자의 하단에는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는데, 목축(木軸) 좌우의 막지(莫只: 마구리)에는 둥글게 깎은 옥(玉)을 부착하였다.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는 지리의 비단으로 덮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인열왕후의 삶을 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금석문의 제작방식과 장황형식까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영조 대에 이르면 왕비나 세자빈의 지석은 2판의 판석에 만든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조 대에는 왕비의 경우 왕과 차이를 두어 한 편으로만 제작하였음을 인열왕후의 지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谿谷集』 張維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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