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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자료명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김귀영(金貴榮), 송인(宋寅), 남응운(南應雲),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1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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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전라북도 남원 (현재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
· 작성시기 1577
· 비고 2-5218
157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 조선 왕족
찬자 김귀영(金貴榮) 1520 - 1593 조선 문신
서자 송인(宋寅) 1517 - 1584 조선 문신
전서자 남응운(南應雲) 1509 - 1584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대첩비(大捷碑)
· 크기(cm) 320.3 X 154.3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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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세워진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하였다.
원자료제목
· 표제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내용 및 특징]
황산대첩비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12년 전인 1380년(우왕 6) 9월에 삼도관찰사로서 남정(南征)하여 전라도 남원은 운봉(雲峰) 황산(荒山)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금석문이다.
황산대첩(荒山大捷)은 1380년(우왕 6년) 9월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시킨 싸움으로 유명하다. 이보다 앞서 1376년 홍산싸움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이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1380년 8월에는 진포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원수 나세·최무선 등이 화통,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순찰사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를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세웠다.
비문에는 이성계가 아군보다 10배가 넘는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을 이루었으며,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건립 당시 황산대첩비를 수호하는 비각, 별장청 같은 건물을 지었는데, 지금도 그 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산대첩비터는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1575년(선조 8) 가을에 전라도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운봉 고울 동쪽 16리 밖 황산이 있는데, 태조 강헌대왕께서 왜구를 무찌른 곳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지명이 잘못 전해져 오가는 사람들이 찾으려하지만 벌써 분별하여 인증하기 어려움에 정말로 천백세 후에 높은 데가 뭉개지고 낮은 골이 메워져서 더욱 자취가 흐려져서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바라건대 큰 비석이라도 우뚝 세워 길이 전하도록 함이 옳다. 이 고장 노소 백성들이 서로 모여 관청에 소청함에 지방을 다스리는 신하로서 모른 체 할 수 없어 전하께 계달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위치와 경위,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적었다.
비석은 2년 후인 1577년(선조 10) 8월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에 의해 건립되었다.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은 글씨를 썼으며, 남응운(南應雲)은 전액을 썼는데 모두 선조의 명에 의해 임명되었다.
찬자 김귀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이다. 숙춘(叔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사원(士元)이고, 아버지는 응무(應武)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수관(守寬)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임해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어 다시 가토의 강요에 의해 강화를 요구하는 글을 받기 위해 풀려나 행재소(行在所)에 갔다가,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으로 추국(推鞫)당해 회천으로 유배가던 중 중도에서 사망했다. 이후 숙종 때 허적(許積)의 건의로 신원되었다.
서자 송인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菴)이다. 지한(之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령남씨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10세에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충훈부·사옹원·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조식(曺植)·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특히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조맹부(趙孟頫)의 필법을 배워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황산대첩비를 비롯하여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부안의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전서자 남응운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치원(致遠), 호는 국창(菊窓)·난재(蘭齋)·관원(灌園) 등이다.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삭령군수 변(忭), 아버지는 참판 세건(世健), 어머니는 이윤식(李允湜)의 딸이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능해 많은 비액을 썼다. 현재 남아 있는 금석문으로 개성에 있는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과천의 허엽신도비(許瞱神道碑), 장단에 있는 허종신도비(許琮神道碑) 등의 전서가 있다.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의 상징이 되었던 황산대첩비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패망을 눈앞에 둔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발악으로, 반시국적인 고적(古蹟)을 관할 도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파괴하여도 좋다는 비밀문서를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1943년 11월 14일 총독부에서 작성한 이 문서에 의하면 황산대첩비를 포함해 모두 16기의 사적비, 대첩비, 전승비, 기적비, 유지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3년 11월 14일 총독부에서 작성한 이 문서에 의하면 ‘철거할 물건 중 황산대첩비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방법을 강구할 것. (중략)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임.’이라 적혀 있다. 이로써 민족의 영예로서 400년 가까이 전승비로 남아 있던 황산대첩비는 폭파되었다.
1957년 파손된 귀부를 짜 맞추고 비교적 온전한 이수는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이미 파손된 비석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에 검은 대리석으로 원형과 똑같은 비를 다시 만들어 세우고, 폭파된 비석 조각들도 한데 모아 일제의 만행을 상기시켜주고 있는데, 황산대첩비터 안에 있는 파비각(破碑閣)이 그것이다. 파비각의 비석 조각들을 보면 비석을 폭파시키는 것도 모자라 비석 조각의 글씨까지도 읽지 못하도록 긁어놓은 일제의 만행을 목격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 건국 이전 태조 이성계의 공적과 이후 추숭사업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민족정기 말상정책의 일환으로 자행된 금석문 파괴과정과 이후의 복구과정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답사여행의 길잡이 6-지리산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 돌베개, 1996.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 일한인쇄소,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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