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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왕헌릉신도비명(太宗大王獻陵神道碑銘)

자료명 태종대왕헌릉신도비명(太宗大王獻陵神道碑銘) 저자 이방원(李芳遠), 변계랑(卞季良), 윤회(尹淮), 박태상(朴泰尙), 이덕성(李德成), 홍수주(洪受疇),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0-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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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 작성시기 1424
· 비고 2-5230-1, 2-5230-2
1401년(건립)/1744년(중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방원(李芳遠) 1367 - 1422 조선 왕족
찬자-전면(前面) 변계랑(卞季良) 1369 - 1430 조선 문신
찬자-음기(陰記) 윤회(尹淮) 1380 - 1436 조선 문신
찬자-부기(附記) 박태상(朴泰尙) 1636 - 1696 조선 문신
서자 이덕성(李德成) 1655 - 1704 조선 문신
전서자 홍수주(洪受疇) 1642 - 1704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전332.9/후399.2 X 전148.7/후153.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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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제3대 국왕 태종(太宗)의 헌릉(獻陵)에 세워진 신도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태종대왕헌릉신도비명(太宗大王獻陵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헌릉은 태종과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이 모셔 있으며,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소재한다. 1420년(세종 2)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능기(陵基)를 정하고 헌릉이라 정했다. 이후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그해 5월에 원경왕후의 능에 합장하였다. 헌릉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과 함께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신도비가 세워진 것은 세종(世宗)의 구영릉(舊英陵)까지이며 그 뒤의 왕릉에는 신도비의 건립이 폐지되었다.
현재 헌릉에는 2기의 신도비가 있다. 첫 신도비는 1424(세종 6)에 세워졌으나 양난을 거치면서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695년(숙종 21)에 본래의 비를 토대로 중각한 것이 두 번째 신도비이다. 비각은 정자각 오른편 뒤쪽에 있고, 구비(舊碑)는 비각 내 왼편에, 신비(新碑)는 오른편에 있다. 두 비 모두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구비의 비신은 높이 280㎝, 폭 137㎝, 두께 39㎝이며, 비석 전체가 심하게 파손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신비의 비신은 높이 295㎝, 폭 141㎝, 두께 46㎝로 형태와 크기 면에서 구비를 모방하여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신도비가 중건된 경위는 비석의 후면 말미에 있는 「중각비부기(重刻碑附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비 전면의 찬자(撰者)는 변계량(卞季良), 음기의 찬자는 윤회(尹淮), 전액의 전서자는 권홍(權弘)이다. 부기에서 서자는 그 성이 성씨(姓氏)인 것만 알고 이름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 6년 7월 25일 기사에 의하면 성개(成槩)임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병자 양난의 전화를 겪으면서 구비의 석각이 손상되어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1694년(숙종 20)에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여 새 돌에 옛 비문을 개각(改刻)하여 옛 신도비와 나란히 세운 것이다. 첫 번째 비문은 그 내용이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참조하되, 두 기록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모두 구비를 따랐다. 다만 신비에는 후면의 말미에 「중각비부기」를 새로 지어 붙인 점이 다르다. 신비의 서자는 이덕성(李德成), 전액의 전서자는 홍수주(洪受疇), 부기의 찬자는 박태상(朴泰尙)이다. 1864년(고종 1) 인간(印刊)된 『열성지장통기』에는 신비의 비문이 기재되어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탁본의 내용은 전면 2점과 음기 2점이 각각 동일하다. 전면은 서(序)와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는 태종의 공적과 이에 대한 찬양,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곤덕(坤德)과 이에 대한 찬양, 여러 빈(嬪)과 후궁 및 태종의 자손, 왕명에 의해 비명을 찬술하게 된 배경 등의 차례로 구성되어 있다.
명(銘)에서는 태종과 원경왕후에 대해 서문에서 썼던 내용을 4언 82구 총 328자의 운문으로 간추렸다. 태종에 대한 서술은 서두(序頭)→세계(世界)→평생의 공덕과 그 평가→승하와 상장의 예→소결(小結)의 순서로 되어 있다. 여기서 태종은 부왕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보위를 물려받아 내정과 외교를 안정시키고 문물제도를 정비한 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태평성세의 기반을 다진 공적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원경왕후는 집안산림을 잘 다스리고 자녀를 잘 가르쳐서 태종을 부도(婦道)로써 내조한 공을 높게 평가하였다.
전면의 끝부분에는 ‘영락이십이년오월일입(永樂二十二年五月日立)’이라고 구비의 건립일과 ‘후이백칠십이년을해오월일중건(後二百七十二年乙亥五月日重建)’이라고 신비를 중간한 날을 같은 줄에 새겼다. 『열성지장통기』에는 신구비의 건립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음기 탁본의 상단에는 ‘태종헌릉지비(太宗獻陵之碑)’라고 소전(小篆)으로 쓴 제액(題額)이 함께 표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전액은 실제 비석에서는 이수(螭首)의 앞쪽 가운데, 즉 전면의 윗부분에 새겨져 있다. 전액이 탁본․표구되었지만 제자리에 붙어있지 않는 것이다.
후면은 윤회가 지은 비음기와 태종을 도운 공신의 명단, 그리고 박태상의 추기로 구성되어 있다. 비음기에는 태종이 승하한 뒤 그 유언에 따라 원경왕후가 묻혀 있는 헌릉에 합장한 사실, 능의 위치와 그 산세에 대한 설명, 그리고 비를 건립하게 된 내력이 기술되어 있다. 음기의 기록에 따르면 헌릉은 광주(廣州) 서쪽 대모산(大母山) 아래에 있고, 이곳은 북쪽으로 한성(漢城)과 30리 가량 떨어진 곳이다. ‘대모산의 산세는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며, 우뚝하여 숙기(淑氣)가 감돈다.’고 하여 헌릉이 명당자리에 자리하였음을 기술하였다. 또한 본래의 신도비는 세종의 명으로 능에서 손방(巽方)으로 63척 떨어진 곳에 세웠음을 밝혔다. 이후 개국공신(開國功臣), 정사공신(定社功臣), 좌명공신(佐命功臣)의 이름들을 비음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윤회는 예부터 왕자가 일어나면 명세지신(名世之臣)이 때맞추어 나와서 대업을 이룬다고 하여 태종의 신도비에 공신들의 이름을 새기는 의의를 밝혔다.
개국공신은 조선 건국을 도움 공신들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이고, 정사공신은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움 공신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며, 좌명공신은 1400년(정종 2)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움 공신들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이 신도비에는 개국공신 39명, 정사공신 17면, 좌명공신 37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피전자 태종의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이다.
구비의 찬자 변계량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이다. 이색과(李穡)과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조선 초 대표적인 관각문인(館閣文人)이다.
비음기를 쓴 윤회의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이다.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고, 『고려사』의 개수와 『세조실록』 「지리지」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찬집하였다.
구비의 글씨를 쓴 성개의 본관은 창녕으로 성석용(成石瑢)의 아들이자 성석린(成石璘)의 조카이다. 글씨 잘 쓰기로 이름나 여러 유필을 남겼다. 실록에 의하면 1418년(태종 18) 왕명으로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신도비를 썼고, 1420년(세종 2)과 1422년(세종 4)에는 역시 왕명을 받들어 금자(金字)로 『법화경』을 베껴 썼으며, 이듬해에는 『당감(唐鑑)』을 썼다.
부기를 쓴 박태상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 종성재(存誠齋)이다. 1694년(숙종 20) 대제학으로서 인현왕후가 복위할 때 옥책문일 지었다.
신비의 서자 이덕성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득보(得甫), 호는 반곡(盤谷)․지비자(知非子)이다. 글씨에 능하여 당시 이름이 높았다.
전서 비액을 쓴 홍수주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구언(九言), 호는 호은(壺隱)․호곡(壺谷)이다. 169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동부승지로 원접사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맞았는데 문장과 글씨로 격찬을 받았다. 주로 문인화가로 알려져 있으며 매화, 포도 대나무 등을 잘 그렸는데, 특히 포도그림이 유명하다.
헌릉 신도비 중건에 대한 제반 사실에 대해서는 규장각 소장 『헌릉비석중건청의궤(獻陵碑石重建廳儀軌)』가 참고가 된다. 또한 헌릉에 대한 종합적 정보는 장서각 소장 『헌릉지(獻陵誌)』에 상세하다.
[자료적 가치]
왕실 금석문의 파손과 복구과정의 중요한 사례로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자료조사실, 2003.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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