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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왕후제릉신도비명(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자료명 신의왕후제릉신도비명(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저자 한씨(韓氏), 권근(權近), 이의현(李宜顯), 서명균(徐命均), 유척기(兪拓基),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8-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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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황해도 개풍군 (현재주소: 황해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
· 작성시기 1401
· 비고 2-5228-1, 2-5228-2
1401년(건립)/1744년(중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한씨(韓氏) 1337 - 1391 조선 왕후
찬자-비문(碑文) 권근(權近) 1352 - 1409 조선 문신
찬자-추기(追記) 이의현(李宜顯) 1669 - 1745 조선 문신
서자 서명균(徐命均) 1680 - 1745 조선 문신
전서자 유척기(兪拓基) 1691 - 1767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상299.3/하301 X 상119.5/하119.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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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태조(太祖)의 원비(元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에 세운 신도비이다. 본래 1401년(태종 원)에 세워졌는데, 1744년(영조 20)에 중건한 것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신의왕후제릉신도비명(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신의왕후 능인 제릉의 신도비이다. 전액은 ‘신의왕후제릉비명(神懿王后齊陵碑銘)’ 8자를 전면과 후면에 걸쳐 씌여 있다. 전면의 시작부는 이 신도비의 제목인 ‘유명조선국승인순성신의왕후제릉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幷序)’가 씌여 있고, 이후 찬자, 서자, 전서자의 관직과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후 비문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후면의 마지막 부분에는 봉조하(奉朝賀) 이의현(李宜顯)이 왕명을 받들어 추기를 쓴 사실을 기재하였고, 끝부분에서는 1744년(숭정 기원후 117년 갑자) 11월 중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신의왕후는 태조보다 2년 연하로 고려 충숙왕 5년(1337) 9월에 고려의 동북지방 영흥 땅에서 탄생하였다. 부친은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이다. 신의왕후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기 한 해 전인 고려 경양왕 3년(1391) 9월 23일에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 절비(節妃)의 시호를 받았다가, 다시 신의왕후로 추존되었고, 1408년(태종 8) 승인순성(承仁純聖)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대한제국기에 고종황제가 칭제건원(稱帝建元)하면서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다시 추존되었다. 신위는 종묘의 정전 제1실에 봉안되어 있고, 능은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있는 제릉(齊陵)으로 황후 홀로 안장되어 있다.
신의왕후는 6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이고, 차남은 정종대왕(定宗大王), 3남은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 4남은 양안대군(攘安大君) 방간(芳幹), 5남은 태종대왕(太宗大王), 6남은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이다.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는 청주이씨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와 혼인하였고, 2녀 경선공주(慶善公主)는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와 혼인하였다.
이 비는 본래 1401년(태종 원)에 건립되었고. 1744년(영조 20)에 중건한 것이다. 애초의 비문은 권근이 지었고, 1744년에는 이의현(李宜顯)이 추기(追記)를 짓고, 서명균(徐命均)이 본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비액을 썼다.
비문의 내용을 지은 권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이다.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희(僖)이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추기를 쓴 이의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이다. 이후천(李後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악(挺岳)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세백(世白)이며, 어머니는 정창징(鄭昌徵)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문학(文學)에 뛰어나 숙종 때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에 의해 당대 명문장가로 천거되었다.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檢閱)·설서(說書)·정언(正言)·금성현령(金城縣令)·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707년 이조정랑, 이어 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중건비의 글씨를 쓴 서명균은 아버지로부터 아들까지 삼세입상(三世入相)으로 유명하다. 평생 초서를 쓰지 않았으며, 비록 편지에 있어서도 모두 해서로 썼다. 특히 해서를 잘 써서 그가 쓴 《표충사사적비(表忠祠事蹟碑)》, 《간성목양당영안비(杆城牧羊堂靈眼碑)》, 《쌍계사정혜대사비(雙溪寺定慧大師碑)》, 《충렬공홍명구정충비(忠烈公洪命耈精忠碑)》 등 10여 개의 금석문이 전한다.
두전을 쓴 유척기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성증(省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철(㯙)이고, 아버지는 목사 명악(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이다. 김창집(金昌集)의 문인으로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고금의 일에 박통했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이자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를 잘 써 경주의 《신라시조왕비 新羅始祖王碑》, 청주의 《만동묘비 萬東廟碑》 등을 남겼다.
신의왕후와 관련한 금석문은 이 외에도 두 기가 더 존재한다. 1825년(순조 25년)에 건립된 신의왕후탄강구기비(神懿王后誕降舊基碑)는 김이교(金履喬)가 비문을 지었고, 김노경(金魯敬)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의 탁본은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1900년(광무 4년) 건립된 신의왕후제릉표(神懿王后齊陵表)이다.
[자료적 가치]
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에 대한 조선왕실에서의 추존과 금석문의 제작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대 서예와 금석학의 명가인 서명균과 유척기의 글씨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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