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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대왕 정릉신도비명(桓祖大王 定陵神道碑銘)

자료명 환조대왕 정릉신도비명(桓祖大王 定陵神道碑銘) 저자 이자춘(李子春), 정총(鄭摠), 오익(吳翊), 김상용(金尙容),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1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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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도 (현재주소: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
· 작성시기 1393
· 비고 合本2-5216
1393년(건립)/1612년(중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자춘(李子春) 1315 - 1361 조선 왕족
찬자-전면(前面) 정총(鄭摠) 1358 - 1397 조선 문관
서자 오익(吳翊) 1574 - 1618 조선 문관
전서자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319.2 X 158.3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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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조선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신도비이다. 전면과 후면, 추기(追記) 부분을 모두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하였다.
원자료제목
· 표제환조대왕정릉신도비명(桓祖大王定陵神道碑銘)
[내용 및 특징]
현재 함경북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에 소재하는 환조의 신도비명이다. 정총(鄭摠)이 짓고, 이정구(李廷龜)가 추기(追記)하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전액의 문자는 「환조정릉신도비(桓祖定陵神道碑)」이며 글자의 크기는 8.5×7cm이다. 본문의 글자는 2×2.2cm 크기의 해서체이다. 1393년(태조 2년)에 왕명에 의하여 정릉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정총이 지었다.
이 비는 본래 1393년(태조 2)에 새워졌다가 임진란 때 파괴되었는데, 1611년(광해군 3년)에 함경도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의 보고에 따라 1612년에 예조판서 이정구가 추기를 지어 정총의 비문에 더하여 다시 세웠다. 다시 비를 세울 때는 오익(吳翊)이 본문의 글씨를 썼고 이정구가 추기하였다. 좌측 중앙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찍혀 있어 궁궐 소장본이거나 내사본인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내용은, 태조의 건국과정을 합리화하는 부분, 시조 한(翰) 이하 이씨의 가계가 기록된 부분, 이자춘의 자손들을 기록하여 후손의 번창함을 적은 부분으로 나뉜다. 이정구의 추기에는 비를 새로 세우는 내력이 적혀 있다. 동일 탁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씨의 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조 이한이 신라에 벼슬하고 사공(司空)에 올랐고,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김군윤(金軍尹)에 장가들어 시중을 지난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벼슬을 지낸 이천상(李天祥)을 낳았. 이천상은 아간(阿干)을 지낸 이광희(李光禧)를 낳았다. 이광희는 사도(司徒)를 지낸 입전(立全)을 낳았다. 사도는 긍휴(兢休)를 낳았고, 긍휴가 렴순(廉順)을 낳았고, 염순은 승삭(承朔)을 낳고, 승삭은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은 경영(景英 )을 낳고, 경영은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부 용부(勇夫)를 낳고, 용부가 내시집주(內侍執奏) 린(璘)을 낳고, 린이 시중(侍中) 문극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 양무(陽武)를 낳고, 양무가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다. 안사는 후에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남경 5,000호소의 장관인 다루하치가 되었는데 이 분이 황고조(皇高祖)이며, 목왕으로 추존되었고 능은 덕릉(德陵)이다.
황증조의 이름은 행리(行里)로 천호의 벼슬을 받았으며 능은 지릉(智陵)이다. 배위는 등주최씨인데, 정비로 추전되었고, 능호는 숙릉(淑陵)이다. 황조(皇祖)는 찬성사 중직을 받은 춘(椿)으로, 도왕(度王)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는 의릉(義陵)이다. 배위는 문주박씨로 경비(敬妃)로 추존되었고, 능호는 순릉(純陵)이다.
황고(皇考)는 문하시중 영록대부 판장작감사 삭방도(朔方道) 만호(萬戶) 자춘(子春)이다. 여러 차례 국경을 방위하는 전공을 세워 만호의 수장으로 있다가 공민왕 9년에 삭방도에서 병환으로 죽었다. 이 때 나이가 46세이고, 그 해 8월에 함주 동편 귀주산 언덕에 장례지냈다. 환황(桓王)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는 정릉(定陵)이다. 배위는 최씨로 판문하 영흥백 정효공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최씨는 의비로 추존되고, 능호는 화경(和慶)이다.
비문을 지은 이정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조선시대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 · 치암(癡菴) · 추애(秋崖) · 습정(習靜) 등이 있다.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비문의 글씨를 쓴 오익(吳翊)의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필보(弼甫), 호는 월강(月岡) 혹은 묵재(默齋)이다. 상서원직장(常瑞院直長) 극군(克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세현(世賢)이고, 아버지는 우참찬 억령(億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일운(日雲)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병조좌랑겸지제교(兵曹佐郞兼知製敎)로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검상(檢詳)·사인(舍人)·승지 등을 역임하고,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에 능하여 이 신도비 외에도 이원손묘갈(李元孫墓碣) 등을 썼다. 그의 부친 오억령(吳億齡) 또한 초서·예서·전서를 고루 잘 썼다.
전액은 쓴 김상용은 해서와 행서는 왕희지와 왕헌지를 본받았으며, 특히 조선 중기 전서와 예서의 명가로 유명하다. 조선 중기 ‘우암찬(尤庵撰) 동춘필(同春筆), 청음전(淸陰篆)’이라 하여 송시열의 문장, 송준길의 글씨, 김상헌의 두전으로 조성된 석비가 세간에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특히 김상용, 김상헌 형제는 전액 뿐만 아니라 김여물신도비(金汝岉神道碑) 등 당대 사대부의 비문을 쓴 사례가 많이 남아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 개국의 뿌리가 되는 태조 선대의 가계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실금석문의 전란에 의한 파괴와 복구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서예에 능했던 오익, 김상헌 등의 서체를를 금석문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璿源系譜記略』
『璿源系譜鑑』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朝鮮時代 神道碑 硏究」 趙連美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1999.
「朝鮮時代 神道碑 · 墓碑 硏究」 金右臨 고려대학교 대학원, 1998.
「朝鮮時代 陵墓碑에 關한 硏究」 李敏植 한성대학교대학원, 1996.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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