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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자료명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저자 미상, 미상, 권주(權鑄),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GO0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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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여주 (현재주소: 경기도 여주군)
· 작성시기 1383
· 비고 GO021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권주(權鑄)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기비(記碑)
· 크기(cm) 127.3 X 81.8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편(片)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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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내용 및 특징]
여주 신륵사에 있는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의 탁본이다. 원비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에 있는 대장각(大藏閣) 창건과 운영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비로,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써서 1383년(우왕 9)에 세웠다.
원비는 높이 1.33m이며 귀부와 이수 대신 장방형 대석과 가첨석으로 바뀐 형태이고 비신의 보전을 위하여 비신의 양쪽을 돌기둥으로 지탱하고 있다. 비신은 왼쪽 아랫부분이 크게 파손되고 윗부분에도 파손 자국이 크게 나 있으나 남아 있는 부분의 글자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신륵사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던 대장각은 고려말의 유학자 이색(李穡)과 신륵사에 입적한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율론 삼장을 수장하던 건물로서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 유래를 기록한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색이 상총의 권유로 돌아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보시하고자 하나 힘이 부족하여 나옹의 문도들과 함께 각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대장경을 인쇄하고 책으로 꾸며 신륵사에 봉안한 사실을 기술하였다. 특히 이 대장경 불사는 매년 정월 5월 9월에 경전을 읽는 모임을 유지해 나갈 것을 명시하였다. 또한 대장경 봉안과 함께 각각의 인물이 시주한 비로자나, 문수, 보현의 삼존상을 봉안한 사실도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사부대중으로 나누어 단월들의 이름을 열거하였는데 특히 우바새(남자 신도)에 당대 고위 관료들이, 우바이(여자 신도)에 고관 부인들이 대거 망라되어 있다.
비석은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권주(權鑄)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우려고 발원한 인물은 이곡이다. 이곡의 호는 가정으로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다. 이색은 애초에는 불교를 탄핵한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이색이 불교를 가까이 하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이곡이 신륵사에 대장경을 간행하여 보시하려던 약속을 대신 이행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색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381년 4월 연출을 시작해 12월에 끝내고 대장각에 안치하여 공민왕의 자복(資福)과 선고·선비의 명복을 빌었다. 이 불사에는 무학, 최영, 최무선, 권중화 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태고보우 및 나옹선사와도 친교를 맺게 되었고, 나옹스님이 입적한 후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의 탑비 선각왕사비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이 비는 보제존자석종비와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른 맛을 주고 있다. 직사각형 지대석 위에 역시 직사각형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비좌를 올려놓았다. 비좌 상면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꽂고 그 위에 다시 지붕돌을 얹었다. 귀부와 이수를 대석과 지붕돌로 바꾸어 전체적으로 간략화 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은 없지만 나름대로 생략과 간소화된 양식이 오히려 투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양식은 고려 말에 보이는 새로운 형식으로 뒤에 조선시대 석비 양식에 영향을 준다. 비신은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비신이 쪼개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하여 양측면에 화강암으로 만든 지주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비신은 손상이 커 잘려나가거나 탈락된 부분이 많다. 대리석이 화강암에 비하여 석질이 약하기 때문에 양측면에 지주를 세워도 비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 따라서 비문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 어렵다. 건립연대로 탈락되어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다.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남녀 신도)를 구분하여 그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색과 나옹선사 문하생들이 발원하여 우왕 6년(1380) 2월부터 대장각을 지었으며, 경률론(經律論) 3장을 인출하고 수장했었다고 한다.
[자료적 가치]
고려 후기의 간략화 한 석비의 양식과 조선시대 석비 양식의 영향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亞細亞文化社, 1976. 『韓國金石全文』中世上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 1919.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 / 문화재청, 2005.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 / 경기도, 199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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