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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중창비(普光寺重刱碑)

자료명 보광사중창비(普光寺重刱碑) 저자 충감(沖鑑),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3-95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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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남도 부여 (현재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 작성시기 1358
· 비고 3957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충감(沖鑑)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197.0 X 110.6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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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보광사중창비(普光寺重刱碑)
[내용 및 특징]
부여 보광사지에 있던 대보광선사비(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의 탁본이다. 원비는 충청남도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고려시대의 비석이다. 현재 보물 제 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보광사를 크게 일으켜 세운 원명국사(圓明國師) 충감(冲鑑: 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1963년에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비문의 앞면은 건립 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새겼다. 비문에 의하면 원명국사는 19세에 등과하여 선원사에서 뜻을 펴오다가 공민왕 원년(1351)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비나 탑을 세우지 않도록 당부하여 6년이 지나서야 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자료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며 고려 후기의 간략화 된 석비 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충감은 선원사(禪源寺) 출신으로 중국의 강남지방에 유학한 후 간화선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몽산(蒙山) 덕이(德異)의 제자 철산(鐵山) 소경(紹瓊)과 함께 귀국하여 간화선풍을 널리 퍼뜨렸고, 선종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정리한 『선문청규(禪門淸規)』의 보급에도 힘썼다. 1336년(충숙왕 복위5)에 그가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은퇴하자 지방관과 충감의 가족들이 물자를 시주하여 보광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이후 이곳에는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게 되었다. 이 비문은 충감의 제자로서 당시 선원사 주지이던 굉연(宏演)이 원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위소(危素)에게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본래의 비문은 역시 원나라 사람인 양지(楊池)와 주백기(周伯琦)가 각각 본문과 전액(篆額)을 쓴 것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거치며 크게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750년(영조 26)에 당시 주지이던 능일(能一)이 글씨를 다시 새겨 건립하였다.
[자료적 가치]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의 양식과 고려불교사 연구에 유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亞細亞文化社, 1976. 『韓國金石全文』中世上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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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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