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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

자료명 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 저자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5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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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고성 (현재주소: 강원도 고성군)
· 작성시기 1309
· 비고 25365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매향비(埋香碑)
· 크기(cm) 60.6 X 75.8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4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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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 말 삼일포에 세워진 매향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
[내용 및 특징]
고려 말의 산승(山僧) 지여(志如)가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 김천호(金天晧) 등 지방관들과 함께 건립한 매향비의 탁본이다. 본 매향비 탁본에는 건립에 관한 내용이 없지만 후대의 기록인 『동국여지승람』에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는 4면비로서 1면과 2면은 전후면, 3면과 4면은 좌우면으로 구분된다. 장서각 소장 탁본은 장황을 제외한 크기가 132×33.8㎝이며, 전면과 음기를 세로로 함께 표구하였으며, 서체는 해서이다.
매향비란 향나무를 해안지방에 묻고 그 내용을 기록해 둔 비석을 말하며 주로 불교의 미륵신앙과 관련이 있다. 매향의식에 참여한 집단은 주로 해안에 거주하는 지역민들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를 볼 때 고려 말 조선 초에 집중적으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묻힌 향나무는 천년 세월이 흐른 후에 침향이 되어 물 위에 떠오른다고 하는데 강철처럼 단단해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리고 향나무를 그대로 태우면 그을음이 생기지만, 침향은 그을음이 없고 향이 좋기로 세상에서 견줄 것이 없다고 한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의 으뜸으로 향을 꼽거니와 이렇듯 귀한 향을 피운다는 것은 더욱 신성하고, 더욱 경건함을 연상시키는 절대적 의미를 갖는다. 매향의식을 행한 목적은 미륵보살 하생시(下生時) 개최하는 용화회의 초회 설법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음으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를 살도록 해 달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매향비에 나타난 매향의식은 하층서민들의 신앙을 중심으로 행해진 종교의식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들 사회의 신앙과 생활의 일부까지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매향비는 고려 말의 사례가 5곳, 조선 초의 것이 5곳이다. 이 매향비는 시기적으로 여말선초의 사회적 전환기에 세워졌으며, 지역적으로는 강원도 동해안에 1개, 평안북도 서해안에 1곳, 중부 서해안 충청도 지역에 2개, 전라도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에 5개, 서부경남 해안지역 1곳으로 10곳의 매향비가 동, 서 남해안에 걸쳐 분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곳의 매향비 중 8개가 1977년 이후부터 발견되고 있어 연구의 역사가 짧으며 연구논문 또한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다. 매향비는 하층서민들의 불교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이며, 이러한 연구가 축적됨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불교사를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
장서각 소장 매향비 탁본 1면의 내용은 매향의식을 행하고 매향비를 건립한 신앙집단과 전체 향목의 수량, 매향 장소를 개략적으로 기술함과 아울러 매향의식의 목적, 매향비의 건립시기를 기재하였다. 매향비에 나타난 신앙집단은 관직과 성명이 함께 기재된 11명의 지방관들과 제악선존비(諸樂善尊卑)로 표현된 지역사회의 불특정 다수인들로 나뉜다.
2면에서는 매향지와 향목의 수량을 군현별로 기재하였다. 3면과 4면의 내용은 1면과 2면에 기재된 매향의식과는 별 상관이 없으며 단지 미륵보살을 신앙한다는 점과 매향비 건립을 주도한 지방관이 중심이 되어 보(寶)를 설립하였고 동일한 비에 함께 기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엄밀히 말해서 고성 삼일포매향비는 1, 2면의 매향의식과 3, 4면의 미륵보에 대한 내용은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진 비로 파악함이 옳다. 시기적으로 보아 3면의 황제는 원나라의 무종을 의미하며, 국왕은 충선왕을 말하고 있다. 국왕이 사원에 행차시 향도를 결성하여 점등한 일이 후대인 충선왕 때에도 있었던 예로 보아 고성 삼일포매향비에서 황제와 국왕을 위한 보의 결성은 이와 비슷한 취지에서 만들어졌으리라 추측된다. 4면은 미륵전에 불을 켜기 위해 조작된 보를 계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를 시납하였음을 볼 수 있다.
3, 4면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미륵전장등보는 그 목적이 원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충선왕과 그 비인 궁주의 복수하장(福壽遐長)을 기원하기 위해 보가 구성되었으며 구체적인 목적 달성의 방법으로 미륵불 앞의 등을 켜고 있었다. 등을 켜기 위한 일상적인 비용으로 지방관과 토착세력들이 은 1근을 모아 고성두목에게 그 운영을 일임하였으며, 비용의 계속적인 조달을 위하여 토지의 수확물로 경비에 충당하고자 지방관들이 논답을 시납하였다. 이 매향비에는 당시 화폐였던 은을 거두어 처음에는 단기적인 목적으로 운영되었지만 보다 장기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를 시납하였다.
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1 ,2면은 하층서민들의 신앙 활동으로서 동계(東界) 지역사회의 지역민들이 중심이 되어 행하였던 매향의석을 기록하고 있으며, 3 ,4면은 지방관들이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왕실의 수복을 기원하는 내용인데, 이는 상층 지배계층의 종교적 성향을 알려주고 있다. 향층서민의 종교적 활동과 상류 지배층의 종교적 활동이 동일한 비에 기재된 이유는 그들 두 계층이 신앙적 측면에서 동일한 미륵신앙이라는 점과 매향비 건립과 운영을 주도한 사람이 지방관이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사실들이 침향을 가져와 바치는 사례가 기록에 자주 보이는데, 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침향의 용도나 가치는 조선시대에 와서 종교적 의미가 퇴색하면서 점차 왕실을 중심으로 신비한 약재로 전용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조선시대 기록에 나타나는 침향은 모두 약재로서의 효용에 지나지 않고 왕조실록에는 모두 약재로서 수입하는 물품명으로 침향이 등장한다. 결국 매향의 그 크고 깊은 오랜 염원은 본연의 모습과 의미를 잃은 채 우리에게 잔상으로만 남아있는 셈이다. 실제 이같은 매향의 의미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동유(鄭東愈)가 지은 『주영편(晝永編)』에서도 삼일포매향비를 말하면서 ‘매향을 하여 복을 빌었다는 사실은 듣지 못했으며,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술회하였다.
[자료적 가치]
영암엄길리암각매향명, 정주매향비, 사첨매향비 등과 함께 여말선초의 매향의식과 지방의 민간신앙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향촌공동체조직의 실상을 반영하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참고문헌

「여말선초 향촌사회의 변화와 매향 활동」 / 채웅석 / 『역사학보』173, 2002. 『黃壽永全集 4(금석유문)』 / 黃壽永 / 혜안, 1999. 『麗末鮮初의 埋香碑 硏究』 / 鄭炅日 /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 석사학위논문, 1993. 『韓國金石全文』中世下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海東金石苑』上 / 劉燕庭 / 亞細亞文化社, 1976. 「三日浦の埋香碑」 / 藤田亮策 / 『朝鮮學論考』, 奈良市, 196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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