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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진각국사원소탑비(月南寺眞覺國師圓炤塔碑)

자료명 월남사진각국사원소탑비(月南寺眞覺國師圓炤塔碑) 저자 혜심(慧諶), 이규보(李奎報), 김효인(金孝印),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4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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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전라남도 승주 (현재주소: 전라남도 강진군 월남사지)
· 작성시기 1235
· 비고 25364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혜심(慧諶)
이규보(李奎報)
김효인(金孝印)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266.0 X 125.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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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탑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월남사진각국사원소탑비(月南寺眞覺國師圓炤塔碑)
[내용 및 특징]
고려시대 조계산 수산사의 2대 주지 혜심을 기린 탑비의 탁본이다. 비문은 수선사의 제2세 사주인 진각국사가 향공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한 후 보조국사에게 출가하여 간화선을 수행하고 보조국사에 이어 수선사의 사주가 되어 강종의 지원으로 수선사를 확장하고 집정자 최우는 두 아들을 국사에 출가시키는 등 연관을 맺고 월등사에서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원비의 판독은 전면의 거의 전부가 탁본으로 현존한 장서각의 소장본이 중요본이다. 이는 제액 3부분을 포함하여 18장의 종이로 탁본하여 전탁으로 환원하였다. 원비문의 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에서 제작되었으므로, 이 자료만으로 글자의 유무를 거의 확인할 수 없으며, 판독은 절반가량이 가능하다. 문집과 기존의 부분적 판독에서 도움을 받아 적지 않은 글자를 메꿔 넣으면서 겨우 판독이 가능하다. 우측 상단의 모서리에 직각이등변삼각형으로 제액의 첫 글자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비문의 크기는 세로와 가로가 각각 266㎝×125㎝이고,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빗줄기처럼 풍화되었다. 떨어진 부분도 같은 방향을 보이고 있다. 본래 비갓이 있었겠으나 탁본으로는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윗부분이 풍화된 정도가 더욱 심하므로 비신의 파괴보다 먼저 비갓이 비신에서 분리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탁본은 『금석청완』과 『대동금석첩』에 실린 일부분 탁본과 같은 위치를 비교해 훨씬 상태가 좋지 않다.
진각국사비문은 문집본이 가장 쉽게 이용된다. 이를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동문선』본이 다음으로 주목된다. 그 밖에도 문집본을 토대로 여러 차례 활자화되었다. 명칭은 약간 달리 표현되었으나, 내용이 상통하는 비문으로 인쇄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동국이상국집전집』, 권35.
『동문선』, 권118.
『조선불교진흥월보』4, 1915.
『조선금석총람』上.
이능화, 『조선불교통사』下.
『진각국사어록』, 普濟社, 1937.
권상로, 『퇴경당전서』권6.
이 밖에 여러 탁본의 일부를 모아 서책의 형태로 보관하거나, 이를 복사본으로 출간한 자료 가운데 이 비의 탁본이 부분이나마 포함되어 있다. 비록 적지만 서체와 비의 상태, 그리고 글자의 크기와 배열 등을 보여주므로 매우 중요하다. 이 밖에 전문의 탁본을 실은 아래의 자료들이 있다.
조속, 『금석청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이우, 『대동금석서』, 천리대 금서문고 소장.
『진각국사비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비문은 제액 아래 직사각형 공간에 34행의 종서로 쓰였다. 1행당 글자가 꼭 차면 70자이지만, 존경을 나타내는 단어의 앞에 한 글자씩 공간을 남겼고, 비명에는 4구의 운마다 단락을 구분하기 위하여 역시 한 글자씩 띄었다. 또한 공간으로 70자가 못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그보다 많지는 않다. 글자 크기는 거의 같고 정간은 없으나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단아한 멋이 있다. 종서로 쓴 서두는 1행씩 제목, 찬자, 서자가 쓰여 있다.
피전자 진각국사 혜심은 조계산 수선사의 제 2대 주지였다. 그는 수선사를 개창하였던 스승 보조국사 지눌을 보좌하였고 저술을 정리하여 후대에 전했을 뿐 아니라, 이를 좀더 발전시켰던 고승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지눌보다 풍부한 자료가 남아 있다. 진각국사의 비문은 찬자인 이규보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문집본의 다른 예와 마찬가지로 본문인 병서와 비명만을 수록한 비석의 전면에 해당하고 음기는 실리지 않았다. 또한 전면의 서두와 종결부도 생략되었다. 이 비문은 이규보가 쓴 초고를 바탕으로 건립되었다. 문집본과 원비가 공존하는 경우 이를 대조해 보면, 문집본에 비음기, 서두, 종결부가 없을 뿐 아니라 병서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고, 이는 이 비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비문의 전문을 판독하려는 노력은 20세기에 들어서야 시도되었다. 비는 이미 훼손되고 일부만 남은 후였고, 전문의 탁본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의 서두에 실린 제액과 제목, 찬자와 서자를 옮기고 병서와 비명은 문집에서 옮기는 편법으로 전문을 수록한 활자본과 사본이 속출하였다.
비를 세운 시기에 대해서도 뚜렷한 자료가 없다. 문집본에 ‘을미중염(乙未仲炎)에 광원사(廣原寺) 북쪽에 부도를 세웠다.’는 기록에 따라 1235년이 유력했다. 그러나 비석은 부도보다 늦게 세우는 사례가 많고 음기에서1250년 4월에 세웠음이 밝혀졌다. 장서각본의 전면에도 ‘경술 8월 입석’이라 뚜렷히 밝혀져 있다. 이 부분의 판독에서 첫 글자를 확인하기 쉬었으나 다음 글자는 파손이 심하지만 풍화된 무늬와 글자의 획을 분간하여 신중하게 유추하였다. 또한 병서에서 문집본에는 ‘문하시중진양공(門下侍中晉陽公)’으로 최이(崔怡)를 표기하였고, 탁본에는 ‘중서령진양공최휘이(中書令晉陽公崔諱怡)’로 극도의 존칭을 썼다. 이로 보면 최이의 관직이 문하시중이었을 때 이규보가 초고를 썼고, ‘휘(諱)’라 하였으므로 중서령으로 죽은 다음에 비가 쓰였음이 재확인된다. 비를 세운 경술년은 최이의 열전에도 몰후임이 일치한다.
글씨는 제액을 포함하여 모두 해서이다. 글씨체는 고려 전기에 흔히 쓰인 솔경체라 불리는 구양순체가 아니고, 탄연 이후로 뼈대는 그대로 살리면서 안진경체를 가미하여 부드러운 맛을 보이면서도 힘이 있는 변형체로 바뀌었고, 이 탁본도 예외가 아니다. 글자가 쓰인 직사각형의 공간 밖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공간을 마련하여 보상화문이 구름처럼 연속적인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비문의 테두리에 문양을 넣은 양식은 고려 중기부터 유행하였다.
[자료적 가치]
20세기에 들어 이 비문을 주목하고 간접적으로 언급한 논문이 많다. 혜심의 행장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종합적인 자료이다.

참고문헌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 / 李智冠 / 伽山文庫, 1997. 『韓國金石全文』中世上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朝鮮金石總覽』上 / 朝鮮總督府 編 / 亞細亞文化社, 1976.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陰記에 대한 一考察」 / 閔賢九 / 『震壇學報』36, 1973. 「眞覺國師 慧諶의 原碑와 解析上 補完」 / 許興植 / 『정신문화연구』5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朝鮮金石攷』 / 葛城末治 / 1935.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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