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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보현사비(妙香山普賢寺碑)

자료명 묘향산보현사비(妙香山普賢寺碑) 저자 미상, 김부식(金富軾), 문공유(文公裕), 왕해(王楷),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3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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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평안북도 영변 (현재주소: 평안북도 영변군 보현사)
· 작성시기 1141
· 비고 25363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김부식(金富軾)
문공유(文公裕)
왕해(王楷)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00.0 X 112.1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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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묘향산 보현사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묘향산보현사비(妙香山普賢寺碑)
[내용 및 특징]
묘향산 보현사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비(寺蹟碑)의 탁본이다. 원비는 현재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하향동에 소재한 보현사 경내에 전한다. 비문은 일찍 파손이 심하여 탁본을 근거로 글자체를 본뜬 목판본의 내용이 자세하다. 장서각 탁본은 파손 이후의 탁본이며 파손 이전의 고본이 아니다.
묘향산 보현사비는 비신의 높이 200㎝, 너비 110㎝로 정방형의 석부 위에 세워져 있고 민머리의 모습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1141년(인종 19) 김부식이 짓고 글씨는 문공유가 껐다. 자경은 약 2.7㎝의 행서체이고 글자 수는 1200여 자에 달한다. 비신 정면 상단에는 ‘묘향산보현사지기(妙香山普賢寺之記)라는 인종의 어필로 전하는 제액은 자경 약 10㎝의 행서이다. 장서각 소장 탁본은 음기가 없고 9장의 탁본을 1장의 전탁으로 장황하였다. 인종의 제액 글씨는 당시 유행했던 탄연의 글씨와 유사하며, 문공유의 행서 또한 탄연풍을 이었으면서도 나름의 개성을 발휘하였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대사 탐밀(探密)은 화엄교관을 수양한 뒤, 1028년(현종 19) 묘향산에 들어가 이곳에서 안심사(安心寺)를 짓고 살았는데, 1038년(정종 4) 굉곽(宏廓)이 탐밀의 제자가 되어 명성이 높아지자 학승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모두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이에 탐밀과 굉확은 1042년(정종 8) 동남쪽 100여 보 되는 곳에 243칸의 정사를 이룩하여 절을 창건했다. 그 산 이름을 묘향산, 절 이름을 보현사라고 하였다. 탐밀과 굉확이 입적한 뒤에도 제자들이 이들의 교화를 계승했으므로 1067년(문종 21) 문종이 토지를 하사하였다. 또한 이 비를 세우게 된 배경에 관해서도 비문의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두 대사가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이 일을 이어 받았고 주지는 두 대사의 처음 뜻을 계승하면서 불사를 진행하였다. 1067년 성조문왕이 이를 듣고 칭찬한 후 담당관리에게 전지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또한 만약 주지직이 공석이 되면 문도 중에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하며 조사의 도를 계승할 수 있는 자를 아뢰어 임명토록 하고, 좌우를 시켜 길거리에서 세 번 외치게 하되 이를 굳건히 지켜 바꾸지 말라고 하교하였다. 이때 도인 창선(暢先), 각린(覺隣), 승총(勝聰), 혜쌍(惠雙), 성각(性覺) 등이 세월이 지나가서 문묵(文墨)이 민멸되면 조사의 행사(行事)와 임금의 조지(詔旨)가 어두워지고 분명하지 않게 될 것을 우려하여 돌에 새겨서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음기에는 두 대사의 교훈을 이어받은 여러 주지 및 문하승 등 보현사의 관할 밑에 있는 여러 승려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탐밀은 고려 정종 때의 승려로 성은 김(金), 황해도 황주 출신이다. 25세 때 출가하여 일납일발(一衲一鉢)과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지켰으며, 심한 추위가 아니면 신을 신지 않았고 계행을 부지런히 닦았다고 한다. 이름난 고승들로부터 화엄교관을 전하여 받고 현종 19년(1028) 묘향산에 들어가 안심사를 창건하고 법을 이은 제자 굉곽과 함께 학인을 가르쳤다.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정종 8년(1042) 안심사의 동남쪽 100보 지점에 좋은 땅을 가려 243칸의 보현사를 짓고 3,000여 인을 영도하여 선문을 진흥시킨 승려이다. 늘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불경공부에 열중하되, 명사(名師)에 나아가서 화엄교관을 전수받았고, 거란 태평8년(현종 19, 1028)부터는 연주산에 들어가 안심사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굉확은 탐밀의 조카로 1038(정종 4)에 탐밀을 찾아와 제자가 되었는바, 뜻이 같고 기가 합치되었으며 덕이 충만하고 목소리가 컸다. 이 때문에 그에게 배우려는 사람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으나 모두 수용할 장소가 부족하여 1042년(정종 8) 안심사에서 동남쪽 모퉁이 100보 쯤 되는 곳을 골라 243칸의 정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그 산을 묘향이라 했고 절 이름을 보현사라 했다고 한다.
묘향산은 11세기 초부터 기묘하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에서 묘향산으로 불렸다. 그 전에는 연주(延州) 고을에 속해 있는 산이라 하여 연주산이라 불렸으며, 고려 중엽 이후로는 밝은 산이라는 뜻에서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묘향산은 가장 높은 비로봉의 북쪽, 지금의 회천시 부흥리, 류중리, 향천리의 지역에 속하는 반야골, 원명골, 향천골 일대를 구향산이라 하며 이보다 늦게 개척된, 지금의 보형사가 있는 향산천 골짜기 일대를 신향산이라 한다. 지역적 개념에서 신향산은 내향산으로도 불린다. 묘향산은 금강산의 수려한 자연미와 지리산의 웅장한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 기묘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들, 깊은 계곡들과 기운차게 떨어지는 폭포수들, 봄철의 꽃향기와 여름철의 짙은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거기에 새소리와 물소리까지 어울려 뛰어난 절경을 이루는 산이다.
보형사는 수행처로서의 여러 좋은 조건을 갖춘 지리적 여건뿐 아니라 조선시대 구국의 선봉장이었던 서산대사 휴정의 입적처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휴정은 조선 중기의 명승, 승병장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국난을 타개해 줄 것을 휴정에게 간곡히 부탁하였고, 그는 73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병 5천여 명을 규합하며 그 총수가 되었다. 『목은문집』에 의하면 보현사보다 앞서 안심사가 있었고 화엄종에서 조계종사원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이 황폐해지면서 화엄종의 전통도 사라지자, 종세가 우세한 조계종에서 중창하고 사원의 명칭마저 바뀌었음에 기인한다.
보현사비는 일찍부터 인종의 제액과 문공유의 글씨로도 유명해졌다. 서자 문공유(文公裕; 1088~1159)는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평(南平). 개명(改名)은 문고수(文顧壽), 자는 항적(亢迪)이다. 1102년(숙종 7)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 주관하의 남성시(南省試: 진사를 뽑는 시험)에 합격하고, 1112년(예종 7)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 주관하의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하자, 이자겸과 맞섰던 장인 한안인이 죽게 되었으며, 합문지후(閤門祗候)였던 문공유는 형인 문공인 및 정극영(鄭克永)·이영(李永)·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1127년(인종 5) 합문지후에 복직되고, 1129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인종 11) 형인 문공인과는 대조적으로 시어사로서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중(李仲)과 함께, 묘청과 백수한(白壽翰)을 성인(聖人)으로 삼고 천거한 근신(近臣) 김안(金安)·정지상(鄭知常)·이중부(李仲孚)와 환자(宦者) 유개(庾開) 및 이들을 추종한 대신들을 배척하라고 요청하였다가 충주목부사로 좌천되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충의(忠義)로서 탁용되어 호부낭중 동궁시독사 지제고(戶部郎中東宮侍讀事知制誥)가 되었다. 1147년(의종 1) 지어사대사로서 우정언 정지원(鄭知源)과 함께 시사(時事)를 간언하였다. 1148년 서북면병마사 시우산기상시(西北面兵馬使試右散騎常侍), 1149년 보문각학사 시형부상서(寶文閣學士試刑部尙書), 1150년 예부상서, 1152년 형부상서·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글씨에 능했으며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고, 보현사비는 그의 대표적인 글씨로 남았다.
[자료적 가치]
묘향산과 보현사의 내력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자료이며, 이 절을 둘러싼 탐밀과 굉확의 생애와 활동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인종의 어필과 명필 문공유의 탄연체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朝鮮金石攷』 / 葛城末治 / 東京 國書刊行會, 1974.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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