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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

자료명 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 저자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6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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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상남도 양산 (현재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 작성시기 1085
· 비고 25360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석표(石標)
· 크기(cm) 164.0 X 73.8
· 판본 첩장본(帖裝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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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통도사 주위에 설치된 장승을 탁본하여 제작한 탁본첩.
원자료제목
· 표제통도사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
[내용 및 특징]
경부고속도로 통도사 입구에서 35번 국도를 지나 남쪽으로 가면 길 왼쪽에 오래된 비석 하나가 있다. 이를 ‘통도사 국장생석표’라고 하며, 이곳의 행정지명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이다. 장승 꼭대기에는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올려놓았으며, 과거 조선시대까지는 이와 비슷한 수호신인 천하대장군이 지하여장군과 함께 보통 마을의 경계와 리수(里數)를 표시하는 팻말로 세워졌었다.
장승은 용도나 세워진 장소에 따라 이름과 모습도 달라진다. 사람의 얼굴장승은 사원 입구나 마을 밖 또는 성문 밖에 서게 되며, 귀신 얼굴 장승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비보지(裨補地)나 사원 입구 또는 성문 밖에 세웠다. 또 석표로 된 장승은 사원 입구, 사원 경계, 절의 사방 비부지역에 세워지며, 돌을 쌓아올린 모양의 장승은 사원의 비보지역, 사찰경계 표지로 세웠다. 남근 모양의 돌장승과 미륵불 모양이나, 장군석으로 된 장승은 마을 입구나 서낭당에 세워지며 돌하르방은 성문밖에 세웠다.
장승에 대한 이름도 지방에 따라 다르다. 평안도나 함경도는 당승,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장승, 장신, 수살목, 수살막이, 호남지방은 장승, 장생, 미륵님, 수부막(水府幕), 영남지방은 장승, 벅수,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 우성목, 옹중(翁仲), 옹중석(翁仲石), 돌부처, 돌미륵 등으로 불렸다. 장승은 또 이정표로도 세워 그 장승이 있었던 자리를 장승백이라 하는 곳이 적지 않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의하면 통도사는 주의 47,000보이고 사방 4,000의 비보(裨補)를 위하여 열 두 곳에 각각 장생표를 세웠다고 한다. 장생은 시대, 위치, 재료에 따라 명칭이 다르기도 하나 신라부터 조선까지 장생표주(長生標柱), 목방장생표(木榜長生標), 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 장생(長牲), 장승(長丞), 장승(將丞) 등으로 불렸으므로 일반적으로 장승이라고 한다. 이들은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구실을 하였으며,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통도사의 장생은 경계표와 비보의 구실을 하였다. ‘국장생’의 명칭은 아마도 국가의 명령에 의해 건립한 장생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남북으로 길게 일직선으로 트여있는 계곡에서 서쪽은 통도사가 자리 잡은 취서산(鷲棲山)이, 동쪽에는 정족산(鼎足山)을 두고 그 가운데 이 석표가 자리 잡고 있다. 취서산에서 발원한 양산천(梁山川)은 이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 양산을 지나 낙동강 하류와 만나게 된다. 커다란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만든 이 석표의 높이는 167㎝, 폭은 60㎝, 아래의 둘레는 220㎝이다. 남북으로 향한 옆면에는 철정(鐵釘)으로 거칠게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으며, 꼭대기에는 무엇인가 매단 흔적으로 생각되는 세 개의 파여진 홈이 보인다. 동쪽면 아래에는 총알 자국이 있으며, 서쪽 중앙에는 세 개의 깊은 구멍이 있다. 시멘트로 땜질한 넓적한 돌 받침대 위에 남북을 옆면으로 하고, 넓적한 면을 동서로 한 이 석표가 세워져 있으며, 5m 동쪽에는 또 다른 조그만 선돌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석표의 동쪽 위면에는 5~9㎝ 크기로 이두가 4줄로 새겨져 있으며, 바닥에 깔려진 받침대와 선돌에도 각각 문자가 새겨져 있다. 제작 연대는 1805년(고려 선종 2)이다.
면적이 47,000보가 되는 절을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진 장생들은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고, 풍수사상에 의하여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3개 중 하나이다. 130㎝×80㎝의 크기인 바닥에 깔려진 돌에는 ‘일주(一主)’라는 글자와 함께 바위구멍(性血)이 세 개 새겨져 있으며, 앞에 세워진 90㎝×65㎝×20㎝ 크기의 선돌에는 바위구멍 하나와 함께 ‘추호(追戶)’와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닥에 깔려진 돌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고, 이와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선돌이 세워졌으며, 과거에는 이 받침돌을 포함하여 선돌과 함께 석표 앞에 세워져 입구를 표시하였다고 짐작된다. 즉 이 모든 장승이 동서방향으로 넓적한 면을 두고 있어, 지금의 주변상황과는 상당히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국장생석표로는 통도사 외에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압사 입구에 있는 장생과 경상남도 울산군 삼남면 상천리에 있는 장생 등인데, 이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고려 때는 절에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호부에서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전토의 경계선에 세운 석표가 이 국장생이었다. 통도사 주변과 밀양의 무안리(武安里)에만 남아 있는데 두 곳의 국장생이 모두 1085년(고려 선종 2)에 세워졌고, 현재 남아 있는 장생으로서는 매우 오래된 사례들이다. 상천리의 국장생도 통도사의 토지경계선을 표시하였는데, 높이 172㎝, 폭 70㎝, 두께 30㎝이다.
[자료적 가치]
문자가 있는 대표적인 사찰 장승으로 고려에서 경계표의 용도로 쓰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장승과 국가, 종교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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