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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자료명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저자 도헌(道憲), 최치원(崔致遠), 혜강(慧江),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5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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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상북도 문경 (현재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봉암사)
· 작성시기 924
· 비고 25356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도헌(道憲)
최치원(崔致遠)
혜강(慧江)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271.2 X 128.8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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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통일신라의 승려 도헌(道憲)의 행적을 기린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내용 및 특징]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 도헌의 탑비 탁본으로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하나이다. 1963년 보물 제 13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경북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에 보존되어 있다. 신라 경명왕 8년(924)에 세웠으며, 조각과 비문의 글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장서각 소장 탁본은 높이 268.8㎝×121.5㎝이며, 18면의 법첩을 권자본으로 환원한 형태이다.
이 비문을 지은 시기는 비문의 후기 부분에 나타난다. 지증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을 처음 받은 때는 헌강왕 11년(885)이다. 최치원의 나이 29세 되던 해이다. 이 해 3월에 그는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했다. 이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흘러 진성여왕 7년(893)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이 비문을 완성하였다. 또 31년이 지나 경명왕 8년, 그의 나이 68세 되던 해 이 비문을 새긴 비가 건립되었다.
피전자 지증대사(824~882)는 경주김씨로 자는 지선(智詵), 법명은 도헌이다. 9살에 출가하고자 했으나, 어머니가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가, 그 뒤 부석사의 범체(梵體)에 출가했다. 혜은(慧隱)에게 현리(玄理)를 배워 사자산문의 개조인 쌍봉(雙峰) 도윤(道允)의 마지막 자손이 되었다. 경문왕(景文王)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으며, 경문왕 4년(864) 현계산 안락사로 옮겨 교화를 폈다. 헌강왕 7년(881) 왕이 승통 후공(後恭)과 숙정사(肅正史) 배율문(裵律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정하게 하고, 절 이름을 봉암사라 사액했다. 그 뒤 안락사로 옮겨 있다가 헌강왕이 궁중으로 받아들여 스승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헌강왕 8년(882) 12월 17일 59세, 법납 42년으로 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증대사, 탑호는 적조이다.
비문은 지증대사 도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린 내용이다. 통일신라 후기 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승려 혜강(慧江)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다섯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1단락은 서문이며, 제 2,3단락은 본문, 제 4단락은 평결문에 해당한다. 그리고 제 5단락은 추기로, 일반적인 문집의 경우 발문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찬술후기이다. 최치원이 이 비문을 다섯 단락으로 구분한 의도는 본문 가운데 드러난다. 이 비문의 첫 구절에 ‘오상을 다섯 방위로 나눔에’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그 이유이다.
단락을 세분하여 2단락은 여덟 작은 단락으로, 3단락은 12단락으로, 4단락은 8개의 작은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제 3단락을 중심으로 앞 뒤 단락을 서로 대칭되게 구성한 것이다. 여덟 문단으로 구성한 까닭은 득도하는 과정 8단계에서 원용했으며, 12문단으로 나눈 경위는 12인연설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최치원은 단락을 나누어 서술함에 있어 단락 자체에 함축적 의미를 내포했다.
또한 비명의 문체는 고문에 가까운 변려체이다. 이는 최치원 자신이 그만큼 변려문의 격식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기술방식에 있어 유가(儒家)에서의 기술방식을 상당부분 답습하고 있다. 이는 중간 중간 유가경전의 문투를 그대로 인용했거나, 그 본디 문투는 그대로 두고 한 두 글자를 바꾼 것이 많기 때문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2단락에서는 중국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가 지증대사에 이른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여덟 문단으로 세분하여 구성하고 있다. 즉 중국을 통한 불교 전래 경위, 삼국의 불교 수용, 신라의 불교 흥성과 삼국통일, 소승과 대승의 교리 유입, 북산 도의선사의 등장, 남악 홍섭대사의 등장, 득도한 승려들의 자취, 지증대사의 법통 등이다.
제 4문단은 비문이 아니라 비명이다. 이는 지은 사람의 논평 부분이다. 논평이라고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상대방을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일발 사전(史傳)에서는 흔히 ‘논왈(論曰)’ 또는 ‘사신왈(史臣曰)’이라 하여 간략히 사관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러나 이 비문에서는 이 논찬부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도 이 부분이 가장 크다. 그 이유는 첫째, 운문 형식으로 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바로 찬술자, 즉 최치원 자신의 생각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 단락만 보아도 지증대사의 행적을 거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부분은 일반적으로 전기에서도 드러나듯, 산문보다는 운문에 그 함축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그 성격을 같이 한다 하겠다. 또한 이 부분은 7언 44구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내용으로 보면 이 부분이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성은 앞의 2단락과 마찬가지로 여덟 문단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충실하다.
제 1 작은 문단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먼저 내세워 불교와 연결시키고 있다. 제 2 작은 문단에서는 신라에 불교가 흥성하고 학문이 융성하게 된 사실을 적었다. 제 3 작은 문단에서는 지증대사가 득도하는 과정에 대해 말했다. 제 4 작은 문단에서는 지증대사의 현계산과의 인연을 묘사했다. 제 5 작은 문단에서는 지증대사의 업적, 즉 남북 선을 통합한 일에 대해 기술했다. 제 6 작은 문단에서는 득도한 뒤의 지증대사의 심정을 대변하였다. 제 7 작은 문단에서는 득도한 지증대사가 후대에 끼친 영향을 기술하였다. 제 8 작은 문단에서는 지증대사와 석가와의 비슷한 점을 은연중 강조하였다.
이 비명에 나타난 최치원의 의식은 첫째, 동인의식(東人意識), 즉 주체의식이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의식이다. 그 내면적인 의식으로 인간적 보편성으로 비면 전반에 깔려 있다. 그는 이 비명에서 부정보다는 긍정을, 분열보다는 화합을 강조했다. 셋째, 그는 이 비명에서 인간의 후천적 교육을 강조하였다. 즉, 인간의 본성 유지보다는 감정의 정화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글씨는 왕희지체 해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꾸밈없고 우아하다. 전문이 4,000여 자인데 온전하게 보존되었으며 혜강이 80세가 지난 원숙한 글씨이다. 필치는 자획이 단정하고 고아청일(高雅淸逸)한 기품이 있다. 당(唐)의 해서체보다 부드러운 기운을 띄고 있다. 또한 최치원식 당해(唐楷)의 성격이 강하나 석질과 각법의 차이로 풍격의 차이가 크다. 최치원의 글씨와 비교해 소밀의 변화가 적고, 진흥왕순수비 등 고신라로부터 내려오는 신라 고유서체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어 올곧은 가운데 분방함이 감돈다.
[자료적 가치]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新羅時代 律令의 擴充과 修撰」 / 盧鏞弼 / 『洪景萬敎授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韓國史學論叢刊行委員會, 2002 「崔致遠의 中國歷史探究와 그의 마지막 行步」 / 곽승훈 / 『韓國思想과 文化』17, 韓國思想文化學會, 2002. 「新羅 下代 前期 高僧追慕碑의 建立」 / 郭丞勳 / 『韓國古代史硏究』25, 2002. 「崔致遠의 儒佛認識과 그 의미」 / 장일규 / 『韓國思想史學』19, 韓國思想史學會,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 權悳永 / , 학연문화사, 2002. 「崔致遠의 中國史 探究와 그의 思想 動向 -四山碑銘에 인용된 中國歷史事例의 내용을 중심으로-」 / 郭丞勳 / 『韓國思想史學』17, 韓國思想史學會, 2001. 「四山碑銘에 나타난 孤雲 先生의 東方 思想」 / 金時晃 / 『고문연구』10, 한국고문연구회, 1997. 「孤雲 崔致遠의 三敎融合論」 / 李在云 / 『先史와 古代』9, 韓國古代學會, 1997.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Ⅱ / / 國史編纂委員會. 1995. 『新羅四山碑名』 / 李佑成 / 亞細亞文化社, 1995.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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