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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자료명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저자 무염(無染), 최치원(崔致遠), 최인연(崔仁渷),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55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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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현재주소: 충청남도 보령군)
· 작성시기 890
· 비고 25355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무염(無染)
최치원(崔致遠)
최인연(崔仁渷)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251.5 X 148.5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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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無染)의 행적을 기린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내용 및 특징]
통일신라의 승려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1~888)의 탑비를 탁본하여 축장으로 장황한 자료이다. 이 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의 하나이다.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소재하며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4년(890)이다. 비신의 높이는 455㎝, 탑신의 너비는 150㎝, 두께 43㎝이다. 장서각 소장 탁본은 16면으로 만든 법첩 전첩을 권자본으로 환원한 것으로 탁본의 크기는 243.2×140㎝이다.
피전자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13세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그의 속성은 김(金), 호는 무주(無住), 시호는 낭혜이다. 9세 때부터 신재(神才)를 보여 ‘해동신동(海東神童)’으로 불렸다. 13세 때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승려가 되어 법성(法性)에게 수년을 사사하고, 부석사 석징(釋澄)에게서 화엄경을 익혔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고적과 고승들을 두루 방문, 그 이름을 널리 떨쳐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일컬어졌다.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 후의 성주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려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인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으로 성주사(聖住寺)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였으며 왕은 시호를 ‘낭혜(朗慧)’라 하고, 탑의 이름을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내렸다. 이 비를 지은 시기는 건립한 시기와 적지 않은 차이가 있으며, 글씨를 쓴 최인곤(崔仁滾)의 관직으로 보아 920년일 가능성이 크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골품제도의 연구 자료로써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다.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비문은 후대에 세울 계획을 세웠으나 30년이 지나서 실현되었다고 짐작된다.
성주사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모양의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었으나 1974년에 해체, 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구름 위로 비신을 꽂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비신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 맨 위에 올린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트림과 웅장한 기상이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불거져 나와 있다. 앞면에는 제액이 있으나 문자가 마멸되었다.
이 비석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낭혜화상 무염의 기록과 비문에 새겨진 최치원의 글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신라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작품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찬차 최치원은 경주최씨의 시조로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경문왕 9년(869) 13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 표수현위가 된 후 승무랑 전중시어사내공봉으로 도통순관에 올랐다. 헌강왕 5년(879) 황소의 난 때는 고변의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겸한림학사, 수경부시랑, 서서감지사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고,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하였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그가 남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고, 문창후(文昌侯)에 봉해졌다.
글씨를 쓴 최인곤(868~944)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문신으로 최치원의 사촌동생이다. 885년(헌강왕 11)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효공왕 13년(909)에 귀국하여 집사성시랑서서원학사를 제수 받았다. 태조 18년(935)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가 되고, 문한을 위임받았다. 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하여 태자사부로 있을 때 궁원의 액제는 모두 그가 찬정한 것이었으며,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최치원, 최승우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린 사실로도 그의 문명이 짐작된다. 또한 서법도 남달리 아름다우므로 낭혜화상비의 글씨를 썼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과 법경대사자등탑비명을 짓기도 했다. 그의 아들로는 광윤, 행귀, 광원, 행종 등이 있었는데, 광윤은 진(晋)에 유학을 가던 중 거란에게 붙잡혀 갔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오히려 관직에 등용되어 구성(龜城)에 근무하던 중, 거란군이 고려를 침범할 것을 알고 고려에 서신으로 알려와 광군(光軍) 30만을 설치하게 되었다. 행귀도 오월(吳越)에 유학하여 비서랑이 되었다.
이 비석은 최인곤의 글씨로 유명하여 오세창의 『서청(書鯖)』에서는 ‘전체 비의 글자가 모두 4,800여 자로서 모두 고스란히 곱게 남아 있고, 문장도 전아하고 화려하여 풍부하다. 필법이 자못 뛰어난 취미가 있으니 그 자태는 실로 고졸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상이 있고, 뜻밖에 교묘하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자료적 가치]
나말여초의 고승비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거대 탑비의 탁본으로 가치가 있다. 최치원의 문장, 최인곤의 글씨, 석비의 조형미가 모두 뛰어나 역사, 종교, 예술의 방면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아오고 있다. 비문에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이 언급되어 있어 이것은 신라 하대 불교 학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낭혜화상이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유교경전 등을 인용하고 있어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사료이다. 아울러 비문에 신라 골품제와 관련된 결정적인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골품제 연구의 핵심 사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新羅 無染和尙碑의 得難條 해석과 건비 연대」 / 김창호 / 『新羅文化』22, 東國大 新羅文化硏究所, 2003. 「崔致遠의 中國歷史探究와 그의 마지막 行步」 / 곽승훈 / 『韓國思想과 文化』17, 韓國思想文化學會, 2002. 「新羅 下代 前期 高僧追慕碑의 建立」 / 郭丞勳 / 『韓國古代史硏究』25, 2002. 「聖住寺 無染碑의 得難條에 대한 考察」 / 南東信 / 『韓國古代史硏究』28, 2002. 「崔致遠의 儒佛認識과 그 의미」 / 장일규 / 『韓國思想史學』19, 韓國思想史學會,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 權悳永 / 학연문화사, 2002. 「朗慧和尙塔碑銘의 撰述과 崔致遠」 / 趙仁成 / 『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2001. 「聖住寺와 無染에 관한 자료 검토」 / 南東信 / 『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2001. 「朗慧無染의 禪思想」 / 金英美 / 『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2001. 「朗慧無染의 求道行과 南宗禪 體得」 / 曺凡煥 / 『성주사와 낭혜』, 서경문화사, 2001.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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