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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

자료명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 저자 미상, 김헌정(金獻貞),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54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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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상남도 산청군 (현재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 작성시기 813
· 비고 25354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김헌정(金獻貞)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탑비(塔碑)
· 크기(cm) 169.7 X 75.8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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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신라시대 단속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신행선사의 행적을 기린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
[내용 및 특징]
신라 헌덕왕 5년(813)에 경남 산청군 단성면의 단속사에 세운 신행선사의 고승비이다. 현비는 파손되어 전하지 않고 탁본만이 전한다. 탁본만 곳곳에 전래되었으므로 탁본의 가치가 크다. 장서각에 소장된 탁본은 매우 오래된 탁본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때의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첩으로 만든 탁본을 전탁으로 환원한 것이다. 이 탁본에 대해 『한국서예사』(김기승 저)에서는 ‘비문의 탁본은 일찍부터 중국에 전해져 해외에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헌에서만 볼 뿐 실물도 탁본도 얻어 볼 수가 없다.’고 하였던 만큼 희귀하다. 말미 부분에 낙장(落張)이 있어 완전하지 않으며, 약 9백여 자가 수록되어 있다.
피전자 신행선사는 헌덕왕 이전 신라 선 성립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북종선을 신라에 처음 도입한 선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선사의 속성은 김씨로, 장년에 출가하여 호거산에 은거하였던 법랑선사에게 3년간 선법을 배웠다. 법랑선사가 입적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신수선사(?~706)를 이은 보적선사의 문인 지공선사의 관정수기를 받고 귀국 후에는 주로 진주 단속사에게 크게 행화하다가 신라 혜공왕 15년(779)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신행선사가 입적하자 북종선의 법맥은 끊어지고 말았지만, 그 법맥은 혜은선사를 거쳐 지증대사 도헌스님의 희양산문 개창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한국선종사상 위치가 높다.
단속사는 수많은 지리산 사찰 중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융성했으나 함양군 마천면의 엄천사 등과 함께 지금은 몇몇 유물들만 남긴 채 사라진 사찰 가운데 하나로 전해져 올 따름이다. 이 사찰은 산청군 단성면 운리 웅석봉 아래 옥녀봉을 뒷산으로 해 세워졌는데, 거대사찰이었다. S자 형태의 능선을 하고 있는 지리능선의 동쪽 끝머리인 웅석봉 아래 양지 바른 터는 명당으로 산세가 빼어난 곳이다. 단속사의 창건 시기는 이들 기록들로 볼 때 신라시대로 추정되나 정확한 시기는 두 가지 설로 전해진다. 첫째,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는데, 권9에는 ‘경덕왕 25년 신충(信忠), 김옹(金邕)이 면직하였다. 이순(李純)은 왕의 충신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아침에 세속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여러 번 불러도 나오지 않고 단속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나는 산국유사에 ‘경덕왕 22년 계묘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 지리산)에 들어갔다. 두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거기서 임금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살았다.’고 하였다.
단속사는 산문인 광제암문(廣濟巖門)에 짚신을 벗어두고 들어가 절 구경을 하고 나면 짚신이 썩어 못 신을 만큼 절의 규모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이 단속사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은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과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 등 두류산 기행문이 있다. 여섯 번째 벼슬을 사양하고 명종 13년 음력 5월, 58세의 나이로 벗들과 함께 열한 번째 지리산 유람에 나선 남명 조식은 단속사의 모습을 다음의 시 한 수로 읊었다. ‘솔 아래 천년 옛 절이 창연한데, 사람이 한 마리 학을 따라 찾아드니,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 등불은 봉우리의 달을 밝혀주고 방아는 물밑의 망치돌이 대신했네, 부처 앞 향로에는 불도 꺼져 오직 재처럼 식은 마음을 보네’
비문을 지은 김헌정(金獻貞)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실이 전해지지 않으나, 그는 신행의 행적을 기술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도 집어넣었다. ‘마음의 지경이 맑지 않으면서 삼학(三學)의 높은 위치에 오르기 어려운데, 나의 반딧불같은 반짝임으로 선사의 밝디 밝은 햇빛 갚은 광휘를 나타내기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선지식들께서 남보다 앞서 헤아린다지만, 손가락을 가리키며 달을 찾으라고 하거나, 달걀을 깨뜨리고 나서 새벽을 알리게끔 울라고 시키실 리가 있겠는가!’
비문의 글씨를 쓴 영업(靈業)에 대해서는 『근역서화징』의 언급이 비교적 상세하여 신행선사비에 대한 서예사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오세창은 영업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들을 찾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헌덕왕 4년 계사(813)에 세운 단속사 신행선사비는 이간 김헌정이 짓고 승려 영업이 썼으니 진주 지리산에 있다.(『해동금석총목』)
2. 신라 승려인 영업의 글씨는 또한 여위고 힘이 있어 취할 만하다.(『원교서결후편』)
3. 신행선사비의 행서는 맑고 시원하다. (『동국금석평』)
4. 단속사 신행선사비는 영업이 독특히 타고난 솜씨로 쓴 글씨이다. (『해동금석원제사』)
5. 불법이 법흥왕 때에 비로소 일어났고 그 뒤에 큰스님이 번갈아 일어나고 이름난 절이 수도 없이 세워져서 고려 말까지 내려왔다. 그러므로 신라와 고려의 남긴 글씨들이 대개 사탑문자로 많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 전하는 것은 오직 신행선사비가 가장 옛 법에 가깝다고 하겠다. (『서청』)
탁본에서는 말미 부분이 낙장되어 건립 연대를 찾을 수 없지만, 『불교통사』 등 기타 자료들에서 수록한 비문에 따르면 본 비의 건립연대는 ‘元和 八年 癸巳’ 즉 신라 헌덕왕 5년(813)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그가 입적한지 30여 년이 지난 뒤에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탁본을 살펴보면 비의 전액은 없고, ‘해동고신행선사지비병서(海東故神行禪師之碑幷序)’라는 제기가 본문과 같은 크기의 글자로 씌여 있다. 본문의 필적은 행서로 씌여 있는데, 서풍은 강건하고 유려하여 행서의 본령을 여실히 나타낸다는 평을 듣는다. 일찍 중국에까지 전해져서 유명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서가들의 관심을 끌어 이에 관한 논평이 다수 전한다.
[자료적 가치]
원비가 전하지 않는 탁본으로, 본래 첩장을 축장으로 환원한 사례이다. 신행선사의 행적과 신라 선불교, 신행사의 내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일찍부터 서체와 서예사 연구의 자료로 활용되어 왔다.

참고문헌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 權悳永 / 학연문화사, 2002. 「斷俗寺의 創建 이후 歷史와 廢寺過程」 / 宋憙準 / 『南冥學硏究』9,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2000.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Ⅱ / / 國史編纂委員會, 1995.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韓國金石全文』古代篇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智異山 斷俗寺 神行禪師 大鑑國師碑銘』 / 東國大學校 編 / 東國大學校出版部, 1984. 「景德王과 斷俗寺」 / 李基白 / 『韓國思想』5, 韓國思想編輯委員會, 1962. 『槿域書畵徵』 / 吳世昌 / 啓明俱樂部, 1928.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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