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석조각자(百濟 石槽刻字)
· 기본정보 해제 xml

일반사항
· 형식분류 | 고서-금석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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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분류 |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 소장처유형 |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 작성지역 | 미상 (현재주소: 미상) |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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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정보 |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주체 - 인물
역할 | 인명 | 설명 | 생몰년 | 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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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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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사항
· 유형 | 사적비(事蹟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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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기(cm) | 160.0 X 165.0 |
· 판본 | 낱장 |
· 탁본형태 | 습탁(濕拓) |
· 수량 | 1면 |
· 표기문자 | 한자 |
· 상세정보

내용
정의
또 하나의 ‘당평백제비’로 불리는 백제석조각자의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백제 석조각자(百濟 石槽刻字)
[내용 및 특징]
‘석조(石槽)’는 말 그대로 돌로 만든 구유이다. 물을 담거나 연꽃을 심어 감상하던 물건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정림사지5층석탑과 유사한 내용의 명문이 발견되어 흔히 제 2의 ‘당평백제비’로 여겨진다. 석조는 현재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의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조의 외구경(外口徑)은 1.65m, 전체 높이는 1.6m이다. 명문은 자경(字徑) 3.9cm의 해서(楷書)이다. 총 22행이며 1행은 11자씩으로 되어 있다. 「당평제비(唐平濟碑)」의 앞부분인 “원부황왕(原夫皇王)~저축함비(杼軸銜悲)”까지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는 제18행 제19자인 “동벌친린(東伐親鄰) 근위(近違)”(「당평제비」의 제15행 제4자에 해당)까지가 판독이 가능하다. 연대는 신라 660년(무열왕 7)으로 추정된다.
석조의 명문각자는 처음 구부여군아(舊扶餘郡衙)의 부지에서 발견되었다. 이로써 두 종류의 평백제의 내용을 담은 명문이 현존하게 되었다. 이 두 금석문의 시기, 내용, 원래 위치 등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백제석조는 부여현 동헌 건물 앞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박물관 마당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공(工)자형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이 석조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련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으며, 본래 이 석조가 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사용하던 석련지(石蓮池)로 추정하고 있다. 그 형태가 분명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어 백제인의 간결하고 세련된 미감이 잘 나타나 있다.
[자료적 가치]
백제 멸망 당시의 정황을 당나라인의 시각으로 제작된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돌로 제작된 백제의 석조를 통해 백제인의 세련된 미감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權悳永 / 학연문화사, 2002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Ⅰ/ / 國史編纂委員會, 1995.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韓國金石全文』古代篇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韓國金石文大系』 / 趙東元 / 원광대학교출판부, 1981
『韓國金石遺文』/ 黃壽永 / 一志社, 1976 ; 復刊, 1994 ; 『金石遺文 黃壽永全集 4』, 혜안, 199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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