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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진흥왕순수비(昌寧 眞興王巡狩碑)

자료명 창녕 진흥왕순수비(昌寧 眞興王巡狩碑) 저자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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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상남도 창녕 (현재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 작성시기 561
· 비고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163.6 X 166.7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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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경남 창녕에 소재한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탁본이다.
원자료제목
· 표제창녕 진흥왕순수비(昌寧 眞興王巡狩碑)
[내용 및 특징]
1914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으로 창녕의 고적을 조사하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신라시대의 비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위치인 만옥정공원 안으로 옮겨온 것은 1924년이다. 순수라는 말은 천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천지산천에 제사지내고, 지방의 정치와 민정을 시찰하던 고대 중국의 풍습을 뜻한다. 한국에서도 신라 때 진흥왕이 확장한 영토, 곧 당시 신라의 국경을 표기하기 위해 세웠다. 창녕을 비롯해 서울의 북한산, 함흥의 함초령, 함흥의 마운령 등 네 곳에 남아 있다.
창녕의 순수비는 비문이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그러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척경비는 받침돌이나 지붕돌 없이 몸돌만으로 이루어졌다. 몸돌은 한쪽 어깨가 일그러진 사다리꼴로 생긴 자연 그대로의 화강암인데, 크기는 높이 1.78m, 너비 1.75m, 두께 30~51㎝이다. 글자는 돌 한 면을 반반하게 다듬은 뒤 돌의 생김새에 맞춰 테두리선을 돌리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아니면 자연석인 한 면을 반반하게 다듬은 뒤 글자를 새기고, 나중에 글자 주변에 테두리선을 돌렸을 가능성도 있다. 글자는 모두 27줄 643자를 세로로 새겼는데, 대체로 한 줄이 18~27자씩이지만 줄마다 글자 수가 달라 끝줄처럼 3자인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테두리선보다는 글자부터 새겼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그 643자 가운데 판독된 것이 400자 정도인데, 맨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불과 몇몇 글자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비문의 첫 부분에 ‘辛巳年二月一日立’(신사년 2월 1일 세움)이라는 글자가 뚜렷하여, 이 비가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문의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비를 세운 사실, 곧 진흥왕이 창녕의 비사벌국을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나라 땅을 넓힌 사실이며, 둘째, 진흥왕이 고관들을 모아놓고 왕으로서의 통치 이상과 포부를 밝히고 그들에게 백성을 잘 이끌도록 당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진흥왕의 행차에 자리를 함께 한 인물들의 면면을 관직, 출신지, 이름, 직위의 순서로 적고 있다. 창녕비에는 국왕을 따라온 42명의 신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는데, 신라 17관등의 계급이 차례대로 나타나 있어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진흥왕대 중앙정치조직과 지방통치조직 등 신라 정치제도사 연구에서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 權悳永 / 학연문화사, 2002 「新羅 哀莊王代 誓幢和上碑의 建立과 그 意義」 / 郭丞勳 / 『국사관논총』 74집, 국사편찬위원회, 1997.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 盧鏞弼 / 一潮閣, 1996.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 Ⅱ / / 國史編纂委員會, 1995.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2. 「昌寧碑 前半部 記事에 대한 분석」 / 김창호 / 『古文化』 39, 1991. 「昌寧 眞興王巡狩碑의 調査와 判讀」 / 한국고대사연구회 / 『한국고대사연구회 회보』 20, 1991. 「新羅 眞興王 大等의 分化와 그 政治的 背景--昌寧 眞興王巡狩碑 會集人名의 大等관계 부분의 분석을 중심으로--」 / 盧鏞弼 / 『歷史學報』 127, 역사학회, 1990. 「昌寧 眞興王巡狩碑 建立의 政治的 背景과 그 目的--그 敎事部分의 判讀과 內容 分析을 中心으로--」 / 盧鏞弼 / 『韓國史硏究』 70, 한국사연구회, 1990. 『韓國金石全文』 古代篇 / 許興植 / 亞細亞文化社, 1984.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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