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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일명비(聖住寺逸名碑)

자료명 성주사일명비(聖住寺逸名碑) 저자 미상, 김입지(金立之),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GO01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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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남도 보령 (현재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사지)
· 비고 GO016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미상
찬자 김입지(金立之) 미상 - 미상 통일신라 문장가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1.0 X 15.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편(片)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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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성주사지에서 발견된 이름 모를 비석편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성주사일명비(聖住寺逸名碑)
[내용 및 특징]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성주사지에서 발견된 이름 모를 비석조각의 탁본이다. 세로 21, 가로 15㎝의 작은 비석조각으로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작은 비편에는 4행으로 21자의 글자가 남아 있다.
1행: 施朝腹
2행: 萬狀煙嵐
3행: 莫知其建立之
4행: 日銷霧杉篁
5행: 玉世□
현전하는 성주사사적비 탁본에는 위에 보이는 글자와 문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 비편을 성주로 사적비의 비편으로 보는 데 무리가 없다. 또한 사적비의 글자크기와 서체가 같다. 이 탁본은 황수영 박사의 기증본으로 당시 알 수 없는 비편이란 의미로 ‘일명비편’라 이름 붙였지만 현존하는 사적비 탁본과의 비교와 서체 등을 볼 때 성주사사적비의 비편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말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외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이 터에는 국보 제8호인 대낭혜화상 백원보광탑비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1개의 5층 석탑과 3개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글을 지은 김립지(金立之)는 지금은 비편만이 전하는 「성주사사적비(聖住寺事蹟碑)」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825년(헌덕왕 17) 5월에 왕자 흔(昕)을 따라 당(唐)에 건너가 유학하였고, 그 후 돌아와 한림랑(翰林郞)으로서 문한(文翰)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비편의 서체를 볼 때 왕희지 소해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김립지의 「성주사사적비」와 김육진(金陸珍)이 글을 지은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䥐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도 같은 방법으로 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신라의 입비방식과 서체, 전 왕희지 집자비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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