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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사적비(聖住寺事蹟碑)

자료명 성주사사적비(聖住寺事蹟碑) 저자 미상, 김입지(金立之),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GO015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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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현재주소: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 비고 GO015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김입지(金立之)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40.0 X 28.0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편(片)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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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성주사 사적비편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성주사사적비(聖住寺事蹟碑)
[내용 및 특징]
성주사는 백제 시대에 오합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 신라 시대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대사가 머무르면서 다시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이 성주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비에 ‘오합사는 백제 28대 법왕이 왕자 시절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하여 599년에 세웠다. 오합사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백제 의자왕 대에 흰말 또는 붉은말이 등장하는……’로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한다. 이 전국 9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9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말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발굴 조사 결과 중문-석등-5층석탑-금당의 불대좌-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 배치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 외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다. 이 터에는 국보 제8호인 대낭혜화상 백원보광탑비를 비롯하여 통일 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1개의 5층 석탑과 3개의 3층 석탑이 남아 있다.
글을 지은 김립지(金立之)는 지금은 비편만이 전하는 「성주사사적비(聖住寺事蹟碑)」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825년(헌덕왕 17) 5월에 왕자 흔(昕)을 따라 당(唐)에 건너가 유학하였고, 그 후 돌아와 한림랑(翰林郞)으로서 문한(文翰)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새긴 것으로 김립지의 「성주사사적비」와 김육진(金陸珍)이 글을 지은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䥐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도 같은 방법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의 경향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성주사의 내력과 당시 왕희지 집자비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Ⅰ』/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199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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