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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정조가 세손시절 외조부 홍봉한에게 보낸 답신의 초본

자료명 1771년 정조가 세손시절 외조부 홍봉한에게 보낸 답신의 초본 저자
자료명(이칭) 답홍봉조하서(答洪奉朝賀書) 저자(이칭) 미상(未詳)
청구기호 RD00189 MF번호
유형분류 고문서/시문류/서간문(書簡文) 주제분류 국왕·왕실
수집분류 왕실/고문서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기록유산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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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유형분류 시문류(詩文類)-서간문(書簡文)
· 주제분류 국왕·왕실
· 서비스분류 왕실고문서
· 작성시기 1771년(영조(英祖) 47)(發給時期 未詳)
· 청구기호 RD00189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형태사항

· 크기(cm) 34.0 X 69.0
· 수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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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71년 정조가 세손시절, 외조부 봉조하 홍봉한(洪鳳漢, 1713 ~ 1778)에게 보낸 답신의 초본이다.
서지사항
체제 및 내용
여기서 홍봉조하는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이다.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장인이다.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인 174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이 되었다.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으로 인책당한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1763년에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책에 순응해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1768년 영의정에 올랐고, 1770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봉조하는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난 친공신(親功臣)·공신적장(功臣嫡長)·동서반 당상관 등을 소속시켜 예우하는 관직으로, 특별한 직사(職事)은 없었으나 정월 초하루와 동지, 왕의 탄신일 등의 조하례(朝賀禮)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서신의 제목인 '答洪奉朝賀書'에서 '書'자를 먹으로 지우고 본문에 반복해서 쓴 奈何 등에 묵으로 원권(圓圈)을 치거나 "聖上欲聞其誰能顧視而已" 등에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하고 옆에 묵서한 것으로 보아 서간의 원본이 아닌 초본으로 추정된다. 서신의 내용은 정조가 그의 외조부 홍봉한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오랜 동안 답신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부를 묻고 자신의 이복동생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1771)이 제주에서 유배 중 사망하였다는 부고를 듣고 형제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토로하였다. 정조는 홍봉한에게 "죄명(罪名)은 죄명이고 은애(恩愛)는 은애이므로, 성상께서도 이미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외손(外孫)인 제 입장에서야 어찌 형제간의 의친(懿親)을 폐하겠습니까. 더구나 해도(海島)에서 죽었으므로 정경(情境)이 더욱 자별한데, 외손이 만일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일인데도 스스로 천연적인 인애(仁愛)의 마음을 저지한다면, 또 어찌 도리상 감히 편안할 바이겠습니까."라며 은신군의 상에 대해 자신의 심회를 편지에 적고 있다. 은신군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의 둘째 아들로 1760년 작위를 처음 받았으며 1765년(영조 41년) 은신군에 봉군되었고, 같은 해 5월 25일 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과 함께 관례(冠禮)를 행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 은신군(恩信君)에 책봉 되었다. 1767년 7월 현감 홍대현(洪大顯[4])의 딸인 남양 홍씨와 혼례를 치렀다. 1768년(영조 44) 1월 1일 승정원의 건의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은 종친부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에 임명되었다. 1768년에는 종친부유사당상, 은신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사후 1771년 2월 2일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삭직처분되고, 2월 3일 호서의 연읍으로 유배의 명이 내려졌다. 또한 영조의 명으로 형 은언군(恩彥君)과 함께 충청도 직산현(稷山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위리안치 된 뒤 풍토병으로 병사하였다. - 弘齋全書 卷3, 春邸錄3, 答洪奉朝賀
특성 및 가치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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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RD00189_001]
  答洪奉朝賀▣(書)
悲遑中久未書候。慊悵何言。伏未審比來。軆內動止若何。阿睹▣▣(之患)。加减近復
如何伏。且慮無任區區。外孫賦命崎嶇▣(多)乖舛。承聞弟訃於萬里海外。哀慟摧裂。
有難自抑。而烟波遙濶。雲山杳邈。末由奔往。撫柩▣(而)痛哭。以伸兄弟之情。奈何
▣▣(奈何)。且念自今喪弟之後。脊令又將凋稀。感古愴今。傷慟尤切。自不勝涕泗之
交逬。再昨因光恩承聞濟州送人如何之 敎雖知出於謹畏之慮。而外孫之意。窃
有所不然者。嗚呼。難得者兄弟。不可廢者倫理。今者送去之便由於情理之所不
可已。則聖人人倫之至也。自 上聞之豈無俯燭之道乎。且罪名自罪名。恩愛自
恩愛。  聖上亦已下哀矜之敎矣。况在外孫。豈可以廢兄弟懿親耶。且其死
在海島。情境又自別。外孫若不有以顧視。則是豈人情之所可忍耶。以情理之所
不可忍。而自阻於仁愛之天。則又豈道理之所敢安耶。下敎中或有以或命廉察之擧不過爲慮此則外孫
之意竊有不然者■■假使有命廉此不過
▣▣(聖上)欲聞其誰能顧視而已之聖意而已。奉 命者亦何必以此處之送某人送某物歸奏以
傷事軆耶。此則非所當慮也。是以不敢以未然之慮。而停當然之擧斷以行之不
以爲疑▣▣▣▣▣▣▣▣▣▣▣▣▣▣▣▣(伏想聞此言。亦必悽然而感怳然而覺矣)。積阻拜殆將半歲悵黯下懷耿結
難耐于中▣▣▣▣▣▣▣▣▣▣▣▣▣▣(何時可以叙歡耶。惟是日夕祈祝耳。)時雨一過江湖物色想必尤奇
以言乎。景槩雖應淸靜而以言乎。心思則或不無悽感▣(愁)之時靜中遙想▣(懷)
依依也。仲▣(舅)叔舅姑爲侍在耶。日前考送七律謹領二舅和韵律詩。亦爲
依領而韵響淸高意思安閑有時披吟受賜多矣。而自多悲撓不得書謝是
庸咄嘆爲探近候玆以委書餘伏冀對時自祉不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