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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장서각 100년의 발자취

장서각 100년의 발자취
1908 고종 황제가 왕실 서고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규장각, 홍문관, 집옥재, 춘방 등의 서적을 인수관으로 이관
1909 『제실도서목록』 간행
1911 무주 적상산사고본 인수
1914 각 군영의 등록 자료 인수
1915 창경궁 명정전 뒤쪽에 서고를 신축하여 이전
1918 藏書閣’ 현판을 걺
1950 한국전쟁 때 북한이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반출
1950 낙선재 한글소설류를 장서각으로 이관
1964 칠궁 소장 자료 수집
1969 봉모당과 보각의 자료 이관
1970 종묘와 각 왕릉 능재실의 자료 수집
1981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
2011 장서각 신축 개관
1911년에 적상산赤裳山 사고史庫의 서적을 인수한 장서각의 역사가 어느새 100년이 되었다. 100년이라는 기간은 역사적 평가에 따라 짧기도 혹은 길기도 하지만, 소장 자료가 조선왕실이 남긴 최고 수준의 문화재라는 점에서 이를 소장해온 장서각의 100년 역사는 충분히 되짚어 볼 만하다.
                            유교와 문치주의를 국시로 내건 조선은 건국 초부터 국가와 왕실의 주도로 서적을 인쇄하여 보급하고 보관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열정은 조선의 국운이 쇠퇴하는 대한제국기에도 이어졌다.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한 이듬해인 1908년에 대한제국의 황실을 회복하고 황실도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규장각奎章閣, 홍문관弘文館, 집옥재集玉齋, 시강원侍講院 등에 있던 서적을 인수관仁壽館으로 옮기고, 대제실도서관大帝室圖書館을 세우려 했고 『제실도서목록』이라는 간략 목록도 간행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뜻은 한·일 강제병합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일제는 모든 자료를 다시 편성하였고, 조선왕실 관련 기관을 이왕직으로 지위를 낮추었다. 왕실 자료는 창덕궁의 선원전에 임시로 수장하고 이 시설을 ‘이왕직서무계도서실李王職庶務係圖書室’이라고 하였다. 이왕직은 1911년에 무주의 적상산사고본을 인수하고, 1914년에는 각 군영의 등록 자료를 인수하였는데, 수량이 늘어나자 1915년 창경궁의 낙선재 동남쪽에 서고를 새로 짓고 옮겼다. 1918년 여기에 ‘장서각藏書閣’ 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장서를 보관하는 건물을 뜻하는 보통명사인 장서각이 그때부터 고유명사가 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1937년에 이왕직박물관이 덕수궁으로 이전되자 장서각도 옮겨졌다. 광복 이후 1948년에 미군정청은 이왕직을 구 왕궁사무청으로 개편하였고, 1955년에는 장서각의 관리가 창경원사무소로 옮겨졌다. 1961년 9월 13일부터는 장서각의 자료를 일반인이 열람할 수 있게 되었고, 1969년 11월 5일에는 대통령령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정리된 자료들은 1972년에 『장서각도서한국판총목록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 및 보유편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장서각은 한국전쟁 때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이 반출해 가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1950년에는 낙선재의 한글소설류가, 1964년에는 칠궁七宮의 소장 자료가 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또 1969년에는 봉모당奉謨堂·보각譜閣의 자료가,1970년에는 종묘宗廟와 각 왕릉의 능재실陵齋室 자료가 이관되는 등 장서각은 조선왕실의 주요 자료를 소장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 자료들은 1981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실 서적 관리의 전통
창경궁 이왕직도서고 창경궁 장서각
창덕궁 보각 창덕궁 봉모당
무주 정상산 사고(복원건물) 창덕궁 낙선재
칠궁 건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첫번째 장서각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