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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제목 제27회 장서각의 소리: 금요강독회 작성자 홈페이지 운영 담당 작성일 2017-06-02
제27회 장서각 금요강독회 

일시: 6월 2일 금요일 10:00-11:30
장소: 장서각 1층 세미나실
주제: 영조어제 사도세자 치제문(강독자: 박용만)
       1507년 경주 손씨 노비매매 사급입안(강독자: 노인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발표자 : 박용만
○ 발표제목 : 英祖御製 思悼世子致祭文
○ 발표내용 : 이 치제문은 영조가 지은 <思悼世子致祭文>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祭文謄抄󰡕에 <英祖祭思悼世子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祭文謄抄󰡕는 편찬자 및 시기를 알 수 없는 책으로, 제일 앞에 <英祖祭思悼世子文>가 실려 있고 이후에는 일반인의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동안 영조가 지은 <思悼世子墓誌>는 알려졌다. 1762년 7월 楊州 拜峯山 垂恩墓에 사도세자를 장사지내며 묻은 이 묘지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장서각 왕실문헌 연구기반 조성사업, 󰡔영조자손자료집󰡕5, 38~39면에 사진, 원, 번역문 수록) 그러나 이 <사도세자치제문>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그 내용이 <사도세자묘지>보다 내용이 다양하며 충격적이다. 영조는 壬午禍變 이후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록을 모두 삭제하도록 지시하였다. 영조가 이러한 조치를 내린 것은 사도세자의 행적이 향후 세손의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조는 1762년 윤5월 13일 徽寧殿 앞에서 세자를 페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뒀고, 그로부터 8일 뒤인 윤5월 21일 세자는 뒤주에 갇힌 채 죽었다. 영조는 곧장 세자의 位號를 복구하고 ‘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때 사도세자의 나이 27세였다. 그동안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세자의 병증, 악행의 실상, 역모 의혹 등이 논의되었지만, 역시 핵심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의도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생존한 유일한 왕자이며, 후일 세손의 정치적 입지 등 세자의 죽음이 가져올 정치적 파란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 치제문을 통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친다면 용서할 수도 있었던 영조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세손 때문에 폐서인하였다가 다시 위호를 복구시켜 주었음과 세자의 시호와 세자빈의 빈호를 주는 것으로 恩義[은혜와 의리]를 다하였다고 냉정하게 27년 부자의 인연을 매듭지었다. 이 치제문은 영주가 구술하고 宗伯[에조판서]으로 하여 받아 적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사도세자묘지>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영조의 정신적인 충격을 가늠할 수 있다. 구술이라도 어제는 어제이다. 당초 사도세자 관련 기록을 삭제하여 이 제문을 읽으며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단휘문의 일, 세자가 한 말, 뒤주에 갇힌 뒤의 일 등은 현재 파악이 어려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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