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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제목 제24회 장서각의 소리: 금요강독회 작성자 홈페이지 운영 담당 작성일 2017-05-26
제24회 장서각 금요강독회 

일시: 5월 12일 금요일 10:00-11:30

장소: 장서각 1층 세미나실
주제: 아내를 그리워하는 이광사의 시문(강독자: 박용만)
       조선전기 토지매매명문 강독(강독자: 박성호)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발표자 : 박성호
○ 발표제목 : 조선전기 매매명문 번역
○ 발표내용 : 1.1537년(중종 32) 전답 매매명문: 1537년(중종 32) 12월 7일에 우찬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논 두 곳을 배천석에게 팔 때 작성한 매매 계약서이다. 당시 우찬은 나라에서 환곡을 빌려다 썼다가 갚을 능력이 모자라자 자기 소유의 논 두 곳을 팔 수밖에 없었다. 논 약 8마지기는 당시 가치로 목면 4동에 해당하였는데, 실제로는 현물인 정조 12석, 7년생 숫말 1마리, 목면 1정을 받고 팔았다. 조선전기 환곡 운영의 일면과 경상도 예안 지역의 논 매매 실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계약서 작성 당시 조선시대 문서 작성의 관행대로 우찬의 친동생과 사촌동생이 증인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전기 예안 지역의 유력 가문인 단양 우씨와 흥해 배씨 사이의 거래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지점이 있다. 2. 1560년(명종 15) 전답매매명문: 1560년(명종 15) 11월 16일에 박만이와 사노 효운 사이에 논과 집을 맞바꾸면서 작성한 계약서이다. 당사자 간에 집값에 상당하는 논과 목재를 교환하면서 성사된 거래였다. 예안 지역의 8칸 규모의 기와집에 대하여 논 약 7부와 아름드리나무를 지불하였다. 매매의 대가로 곡식이나 목면 등을 지불한 거래와 달리 매물 자체를 서로 맞교환하면서 성사된 전통시대 거래의 일면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정병 박만이와 사노비 사이에 이루어진 거래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계약의 증인과 작성자로 참여한 인물들도 모두 노비 신분이었다. 조선전기에도 노비가 매매의 주체로 등장하는 문서로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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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자 : 박용만
○ 발표제목 : 아내를 그리워하는 李匡師의 詩文
○ 발표내용 :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예조판서 이진검(李眞儉, 1671~1727)과 파평윤씨(坡平尹氏, 1668~1724) 사이에서 5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755년(영조 31) 을해옥(乙亥獄)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762년 부령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친 것이 문제되어 신지도(薪智島)로 옮겨져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을해옥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에 의해 김일경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때 윤지(尹志)도 이 일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나주로 옮겨졌다. 1755년 1월 윤지가 주동이 되어 역모사건, 곧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다. 윤지의 문서상자에서 백부 이진유, 부친 이진검, 이광사의 편지가 발견되어 윤지와 상통했다는 죄목으로 3월 6일 구금되었다. 종친이었고 재덕으로 이름이 알려져 고문은 받지 않았으나, 이광사는 연루된 사실에 불복하였다. 그러나 함께 심문받던 윤상백(尹尙白)이 윤지의 아들인 윤광철(尹光哲)과 친밀했다고 증언함에 따라 3월 30일 2천리 밖 유배가 결정되었다. 아래의 시문들은 이광사가 을해옥에 연루되었을 때 자결한 아내 문화유씨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들이다. 이광사가 옥에 갇히자 유씨부인은 남편이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라 여겨 단식하였는데, 갑자기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는 헛소문에 이광사가 먼저 죽을 수는 없다고 하여 자결하였다. 당시 문화유씨는 3년이나 폐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이광사는 권성중(權聖重)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이 상처하였다. 이에 1733년 문화유씨 유종원(柳宗垣)의 딸과 나주(羅州) 모산(茅山)에서 혼례를 치렀다. 이광사는 문화유씨와의 사이에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이영익(李令翊, 1738~1780), 유재영(柳載泳)에게 시집간 딸(1749~?)을 두었다. 자신으로 인한 아내의 죽음, 유배온 처지에 자신의 손으로 장례도 치르지 못한 이광사의 그리움과 절절한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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