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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윤집(尹集)·정온(鄭蘊) 추모 전교/1799년 윤집(尹集)·정온(鄭蘊) 추모 전교(傳敎)

자료명 1799년 윤집(尹集)·정온(鄭蘊) 추모 전교/1799년 윤집(尹集)·정온(鄭蘊) 추모 전교(傳敎) 저자
자료명(이칭) 1799년 정조(正祖) 전교(傳敎) , 전교(傳敎) 저자(이칭) 미상(未詳) , 국왕:정조
청구기호 RD00145 MF번호 MF35-4653
유형분류 고문서/조령류/전교(傳敎) 주제분류 정치·행정/명령
수집분류 왕실/고문서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고문서자료관 장서각기록유산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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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유형분류 조령류(詔令類)-전교(傳敎)
· 주제분류 정치·행정-명령
· 서비스분류 왕실고문서
· 작성시기 1799(正祖 23)(發給時期 未詳)
· 청구기호 RD00145
· 마이크로필름 MF35-4653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형태사항

· 크기(cm) 32.7/138.7 X 274.0/55.2
· 수량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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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799년(正祖 23)에 정조가 윤집(尹集)과 정온(鄭蘊)의 충정을 기려 정식(鄭軾)에게 벼슬을 내리며 지어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두 집안의 가묘(家廟)에 걸게 한 전교(傳敎)이다.
서지사항
체제 및 내용
윤집(尹集, 1606~1637)은 1631년 문과에 급제하여 1636년 이조정랑·설서(說書)를 지낼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오달제(吳達濟) 등과 함께 화의를 극력 반대하다 심양(瀋陽)으로 잡혀가 고문 끝에 사형되었다. 1686년(숙종 12) 숙종은 윤집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온(鄭蘊, 1569~1641)은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하자 자결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 그에게는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홍재전서』에 〈서게윤충정집정문간온양충신가묘(書揭尹忠貞集鄭文簡蘊兩忠臣家廟)〉란 제목으로 서(序)와 함께 칠언절구 1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앞부분에 서(序)와 칠언절구가 기재되었고 뒷부분에는 정조의 전교가 기록되었는데, 모두 정조의 어제어필이다. 문서는 앞부분이 결락되어 “朝詣冽泉門外行禮 仍審敬奉閣新址 雖是謄鏤之本 皇朝誥勑 藏于皇壇之傍 絳雲靑𥳑 若接昔日皇華之盛 周旋登降 當作何懷 自洪武二十五年 煌煌誥勑 輝暎海山 四” 67자가 빠져 있다. 이 문서는 두 건의 문서가 이어진 점련문서이다.
특성 및 가치
 

참고문헌

홍재전서 권7
정조실록 권52, 정조 23년 7월 24일
승정원일기 정조 23년 7월 24일
장서각소장 고문서대관1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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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RD00145_001]
 牡交馳視同內服
 惟我
列祖是承是述拱
 護如彜器尊閣
 如大訓逮至南
 城之 駐蹕也
 貞公尹集
文簡公
 鄭蘊
言於
行在曰彼若求
皇朝誥印以義爭
 之彼必見諒
聖祖獎之而時危
 事窘難以義爭
 太王珠玉不得全
 有於去邠之時則
 此志士仁人所以撫
 膺長嘷至於抆血
 而不知止者也適
 當是閣之移建
 想古人爲國先
 事之憂尤切曠
 感李提督三學
 士兩大臣祀孫之
 參班昨旣有命文
[원문:RD00145_002]
 簡後孫豈可獨
 漏乎使之一軆參
 班騎箕百年久
 闕官享豈非欠典
 文簡公鄭蘊
 祀孫內瞻奉事
 鄭軾特除守令
書下七言絶句一首書揭忠貞文簡忠臣家廟
用示予寤寐不
忘之意
日長山色碧嵯峨
鍾得乹坤正氣
多北去南來同
一義 精金堅石
不曾磨
 傳敎仍作小序書之而
 直除守令下添書書
 下七絶句一首書揭忠貞
 文簡兩忠臣家▣▣▣(揭之家)
 廟云云其下以傳敎結語
 書之一件給鄭軾一件送于
[원문:RD00145_003]
尹忠貞家而物力分付該曹
該道備給
  傳敎則只以本文書出
  守令口傳擧行而以榻敎
  內贍官員鄭軾守令今
  日內擬入事書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