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입학도설(入學圖說)

자료명 입학도설(入學圖說) 저자 권근(조선)(權近(朝鮮)) 저(著)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PC2-9A MF번호 MF35/4435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子部/儒家類
수집분류 민간/구입본/고서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서지 전자도서관 해제 전자도서관
원문텍스트 이미지 장서각통합뷰어* 원문이미지

· 원문이미지

닫기

· 상세정보 해제 xml

닫기
자료제공처전자도서관
번호169605
서명入學圖說.
저자權近(朝鮮) 著
판사항木板本
간사사항明宗2(1547)
청구번호C2-9A
MF번호MF35/4435
형태사항不分卷1冊:圖, 四周雙邊 半郭 27.5 × 18.4cm, 13行24字, 上下黑口, 混入花紋魚尾;34.1 × 22.7cm
인기
안내정보
해제入學圖說 千惠鳳 權近(1352∼1409) 奢. 木版本. 太祖6(1397)刊. 1冊. 四周雙邊, 半郭19.2×13.3㎝. 有界. 半葉13行 24字 上T下向黑魚尾. 크기23.3×l6.3㎝. 線裝. 跋: 洪武三十年丁丑(太祖6,1397)二月初吉 嘉善大 夫晋陽大都護廉管內動農兵馬團練使金爾音敬跋. 紙質:楮紙. I.著作의 成立 著者 陽村 權近(1352∼1409)은 好學聰明하여 일찍이 18歲로 高麗恭愍王朝에 登第, 史翰에 選補된 後 순탄하게 여러 官職을 거쳐 高麗禑王朝에서는 左司議大夫 成均大司成 禮儀判書 左代言 그리고 密直副使의 차례로 累陞되었다. 同王朝에서 특히 그는 王의 淫戱無度함을 여러 번 極諫한 記錄이 보이고 또 14年(1388)에는 國相 崔瑩이 明의 鐵嶺衛 設置에 대하여 不滿을 품고 遼東을 치려고 할 때 李成桂와 함께 親明策을 取하여 결국 成功으로 이끌기도 했다. 뒷날 그가 成桂로부터 重用되어 총애를 받았던 것도 그 因錄이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高麗 昌王朝에 있어서는 厚德府尹을 거쳐 蒼書密直司事로 除授되더니 門下評理 尹承順과 함께 明나라 使臣으로 差出 派遺된바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는 使命을 마치고 歸國途中 明 禮部의 咨文을 사사로이 開封하여 그 內容 을 探知하고 掃京後도 都堂에 바치기에 앞서 昌王의 外祖인 李琳에게 몰래 보인 일이 탄로되어 마침내 劾貶의 궁지로 빠지고 만다.① 高麗恭讓王1年(1389)12月에 遠地로 流配되더니 2年 正月에 臺諫의 論劾으로 極刑에 處하게 된 것 을 成桂의 도움으로 百杖의 處罰로 그쳤고 以後 興海, 金海, 淸州獄 益州(全北益山)등의 차례로 謫居가 계속됐다. 그러던 中 그해 11月에 ‘外方從便'그리고 翌年正月에 ‘京外從便'이 許諾되더니 그해 2月에 成桂의 또 한번의 特別配慮로 赦免되어 忠州의 陽村에서 安居의 몸이 되었다. 本圖說은 이러한 그의 流謫生活中 바로 恭讓王2年(1390) 7月에 全羅道 益州로 流貶되어 그해 11月에 外方으로 從便이 許諾되기까지의 5個月사이에 著述된 것이다. 그는 歸鄕한 恭讓王3年(139l) 2月以後 太宗9年(1409)에 歿하기까지 사이에 禮記를 비롯한 易· 詩· 書·春秋등 五經의 淺見錄③과 四書五經口訣 東國史略 文集등을 著述하였지만, 그 중 本圖說이 바로 그의 最初의 力作이 된다. 그 著述의 動機는 本圖說의 卷首 自序에 의하면 ‘洪武庚午(1390)秋 謫在金馬郡 有一二初學輩來讀庸學二書者語之諄復 尙不能通曉 乃本周子之圖 參章句之說 作圖以示 叉取先賢格言 以釋其意 學者因有所問 又顧而答之 仍話其問答之言 以附其後 名之曰入學圖說 旁取他經 凡可作圖者 皆圖之 往往各附#見之說……是歲良月初吉 이라 하였듯이, 高麗恭讓王2年(1390) 가을 流謫되어 金馬郡益州에 있었을때 1·2의 初學者가 와서 中庸과 大學을 공부하였는데 말의 뜻을 몇 번이나 되풀이 설명해도 理解하지 못하여 그들을 위해 그해에 엮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問題는 우리가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人學圖說의 內容이 과연 이때에 모두 著逑되었는가 하는 點이 다. 陽村年譜릍 보면 ‘洪武 二十三年庚午(1390) 七月 又貶益州 著入學圖說'이라 있고,④종래의 一般學者또한 그렇게 여겨왔다. 그러나 洪武丁丑本 즉 太祖6年(1397)의 晋陽(州)初刊本을 보면 그렇게 여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이에는 前·後集中 前集에 該當되는 것만이 수록되어 있고 그 끝에 그것이 完結임을 표시하는 ‘人學圖說終이 刻入되어 있다. 이것이 말하자면 益州의 流謫地에서 定稿된 것의 全部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와같이 여 기는 根據로서는 또한 다음과 같은 事實을 들 수 있다. 첫째, 洪熙乙巳本 즉 世宗7年(1425)의 晋#後믐刊本을 보면 相當한 量이 ‘後集 으로서 增補되었는데, 그때의 刊行經緯에 관하여 쓴 陽村의 門人 季良의 跋을 우선 援用하면 이러하다. ‘其前集曾經先生手校 而刊之晋陽 顧其歲久而字巳 矣 後集則先生旣歿 而其本始出 字又多缺 惜哉 先生之子代 言蹈蠣慶尙道朴經歷融刊行 其監司李公叔畝及今監司河 公演皆爲致力焉 <비0x640B>前奉常注簿鄭陟書之 復<침0x7761>梓于晋陽 牧 使李公穗·判官潘茂良監督 功說 ‘前集'은 晋陽(州)初刊本의 金爾音跋에도 予於丙子(1396) 秋 來守晋陽 因學者見寫本 嘆其精到 命工繡梓라 있듯이, 본시 益州에서 著逑한 것의 寫本을 求해 著者에게 보내어 그의 手校를 거쳐 太祖6年(l397)에 始<침0x7761>한 것이고, ‘後集'은 그가 歿한 後 비로소 나온 原椅를 그의 아들 權蹈의 주선으로 世宗7年(1425)에 刊行한 것이니 결국 그 後集은 著者가 그 後歿하기까지 사이에 繼續硏究한 稿를 追刻한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實際問題로서 晋州後刊本을 보더라도 본시 不分卷인 것에 後集을 追補한 것이 역력히 들어 난다. 追補할때 비 로소 ‘前集’의 표시를 本文 首葉의 ‘天人心性合-之圖의 下隅 그리고‘後集’을 追補된 첫 本文인 ‘十二月卦之 圖'의 下隅에 각각 조그맣게 陰文으로 追刻했던 것이다. 둘째, 追補된 後集末에 陽村의 所作인 ‘掛枋過牒之法이 붙어 있는데, 그에 관하여 朋友인 二峯 鄭道傳이 ‘道傳一日得掛功過<설0x6645>之法 反復參考 莫知其說 示可遠請講焉 可遠解之 爲-小圖 條分類釋 如指諸掌 雖以余之昏蒙 -覽了然 噫朋友講論 其有益於學也如此夫 洪武戊寅(1398)夏五旣望 三峰道人鄭道傳識’云云과 같이 쓴 것에 의해서도 立<증0x735E>된다. 可遠(近의 字)즉 權近이 掛付 過<설0x6645>法에 대하여 小圖를 만들고 條分類釋 해서 그 內容을 一覽了然케 했다고 칭찬한 글을 쓴 해가 바로 太祖7年 (1398) 5月이기 때문이다. 이 때는 晋州에서 初刊本이 나온 翌年이요, 鄭道傳이 二次王子亂 때 被殺되기 3 個月前이다. 以上의 考察을 통하여 보건대, 前集에 該當하는 著作은 대체로 益州 流配時에 成立된 것이고, 後集은 主로 그 以後 歿하기까지 사이에 繼纘硏究하여 成稿시킨 것이라고 봄이 옳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本圖說의 前·後集은 著 者가 高麗恭讓王2年(1390)7月 益州에 流謫된 以後 그가 歿한 太宗9年(1409)까지의 生涯中에 著作한 것이 網羅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Ⅱ. 收錄內容 및 그 範圍 益州에 流配된 무렵에 藁成된 것을 土臺로 苦者의 手校를 거쳐 晋州에서 太祖6年에 開板한 것이 初刊本이라 하였는데, 그에 수록된 說의 內容 및 그 範圍는 아래와 같다. 天人心性圖·說 天人心性分釋之圖 ·說 天·人·心·性,附 學者問答 大學指掌之圖·說 大學立傳變文以分知行本末厚薄三節辨議 中庸首章分釋之圖·說 中庸分節辨議 諸侯昭穆五廟都宮之圖 時<겁0x54B8>之圖 一室之圖, 附 學者問答 語孟大旨 五經體用合一之圖·說 五經各分體用之圖·說 春王正月橫看分釋之圖·說 河圖五行相生之圖·說 洛書五行相剋之圖·說 太極生兩儀四象八卦之圖·說 先天方位圓圖·說 先天方位方圖·說 伏義先天八卦 文王後天方位 陰陽六九爲老之圖·說 天地生成之數·說 河圖中宮之數·說 洪範九<주0x72CA>天人合一圖·說 上下 無逸之圖·說 上記의 것은 追補 重刊될때,‘前集으로 陰刻表示된 앞 部分의 圖說이며, 그 內容은 庸·學을 中心으로하고 이에 곁드려서 參考로 他經에 관하여 圖說한 것이다. 그는 劈頭에서 周濂溪의 太極圖와 朱熹의 中庸章句의 說에 근거, 人問의 心性을 천착하고 이에서 理氣 四端 匕情을 演繹하여 朱子學의 大要와 儒學의 본바탕을 밝히고 있다.陽 양양 陽 村의 入學圖說이라면 으례 天人心性合一圖·說을,念頭에 두듯이, 이것이 그의 根本思想을 표명해 주는 核心部分이 된다. 그 理論 展開에 있어서 李滉은 內容이 細密하며 圖形이 巧를 다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心字로서 天人合-의 理致를 說明함에 있어서는 杜撰이요 牽强的인 論法이 아닐 수 없다고 評하였고, ⑤韓元震같은 이는 天人心性合一을 標榜하면서도 其實은 理氣를 分離시켜 二物로⑥보고 있기 때문에 名實相反하다고 指摘했지만,⑦ 그러나 性理學이 導入된 初期의 開拓的 穿鑿이요 그것이 後學의 斯分野硏究에 至大한 影響을 끼쳐 주었으니,그것만으로서도 높이 評價되는 著作이 아닐 수 없다. 그 다음의 ‘大學指掌之圖· 說’과 ‘大字立傳變文以分知行本末厚薄三節辨議’ 는 大學, 그리고 ‘中庸首章分釋之圖’와 ‘中庸分節辨議'는 中庸에 대하여 朱子를 비롯한 諸說을 參考하여 自己의 見解를 피력한 部分이다. 그 中 특히 ‘大學指掌之圖’는 元의 胡氏訣을 參考했다고 하지만,⑧워낙 精해서 退溪도 그의 ‘聖學十圖'에서까지 이 大字圖를 引用하고 陽村의 所作임을 明示해 주고 있다. ⑨그리고 ‘諸 侯昭穆五廟都宮之圖’以下 ‘一室之圖' 는 朱熹의 中庸或問과 그의 考定인 昭穆<겁0x54B8>享圖등⑩을 參考하여 圖說한 것에 該當한다. 그 다음부터는 庸·學을 除外한 二書五經에 관한 것이며,그 첫번째의 ‘語孟大旨'가 論語와 孟子의 節次 또는 大旨를 다룬 것이다. ‘五經體用合一及 各分體用之圖·說’은.五經의 全體와 分體의 大用에 관한 圖說이고, 그 以下는 五經中 主要經에 대한 細分圖說이다. 즉 ‘春王正月橫看分釋之圖·說'은 春秋,‘河圖五行相生之圖· 說’ 以下‘河圖中宮之數·說은 周易, 洪範九<주0x72CA>天人合一圖·說’ 以下는 書經에 관한 것이다. 이 二書五經은 經本文 또는 集註에 근거하여 그 大綱을 그린 平凡한 圖說에 지나지 않는다. 世宗7年(1425)에 晋州에서 本圖說이 다시 刊行되었을때 追補된 後集의 內容과 그 範圍는 아래와 같다. 十二月卦之圖·說 周天三辰之圖· 說 一朞生閏之圖·說 天地竪看之圖·說 天地橫着之圖·說 望前生明之圖·說 望後生魄之圖·說 斜(土)圭測影之圖·說 土旺四季之圖·說 律呂隔八相生之圖·說 五聲八音之圖·說 周南篇次之圖·說 變風十三國之圖,說 公族及大宗之圖·說 上記의 것 中‘十二月卦之圖·說’ 以下‘土旺四季之圖· 說’은 天文曆象에 관한 것이다. 그 中 ‘十二月卦之圖·說'은 본시 鄭道傳의 所作을 轉載한 것이며, ⑪周天三辰之圖·說'은 그 當時 傳來되었던 天文圖石本에 근거한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⑫‘律呂隔八相生之圖· 說’과 ‘五聲八音之圖·說은 律呂이고 以下는 詩傳國風 禮記 등에 근거하여 圖說한 것이다. 이 後集은 五經中 前集에서 다루지 않은 것을 圖說한 것이며, 主로 易傳 詩傳 書傳 및 禮記中의 該當 本文集註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明宗2年(1547)에 榮州에서 刊行된 刊本의 卷末에서 볼 수 있는 ‘三峯先生心氣理篇,心門·天答’은 鄭道傳의 所作을 ⑬補添한 것이다. 要컨대, 本圖說은 周濂溪의 太極圖와 朱熹의 中庸章句의 說을 參酌,人間의 心性을 圖說해서 性理學의 根本理 論을 표명하고 庸·學 大要를 作圖하여 先賢의 格言과 自己의 見解로 解釋하였음이 核心部分이다. 그리고 이에 學者의 質問에 答한 것과 庸·學을 除外한 二書五絳의 要旨에 관하여 <도0x5B9C>說한 것을 곁들인 것이 本內容의 要略 이다. Ⅲ.板本의 種類 가. 晋州(陽)初刊本 위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本圖說의 初刊本은 太祖6年(1397)에 晋陽 즉 現 晋州에서 開板한 것에 該當한다. 晋 州에서는 後述하는 바와 같이 世宗7年(1425)에도 重刊되었으므로 그것과의 議別를 위해 晋州初刊本이라 稱해둔다. 半葉의 匡郭크기가 세로19.2㎝ 가로13.3㎝(各<변0x62AF>의 內側 測定)이며, 行字敎가 13行25字의 ‘字劃過細’⑭小形本으로서 卷末에 ‘洪武三十年丁丑(1397)二月初吉 嘉善大夫晋陽大都護府使…金爾音敬跋'이 붙어 있다. 이것은 金爾音이 太祖5年(1396)에 이곳의 府使로 赴任하였을 때 學者하여 因하여 本圖說 前集의 寫本을 보고 바로 그 繡梓를 命하여 翌年2月에 畢役시킨 것에 該當한다. 現傳本으로 서 國立中央圖書館과 金完燮氏藏本을 實査하였다.⑮그중 前者에는 若干의 錯張과 半葉의 缺張이 있으며, 後者는 아깝게도 鼠毁로 冊의 三分之一을 완전히 잃어 廢冊의 상태에 있다. 나. 晋州後刊本(小·中形의 2種) 晋州後刊本은 實物을 調査하여 보니 2種의 刊本이 傳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半葉의 匡郭크기 세로 16.7㎝ 가로 15.8㎝에 行字數가 14行22字 小形本이고,다른 하나는 半葉의 匡郭크기 세로25㎝ 가로14.5㎝에 行字數가 13行24字인 中形本이다. 이 兩本은 어느 것이나 前.·後集이 <병0x62C4>錄되어 있고 책머리에 ‘洪熙乙巳(1425)夏晋州牧繡梓’의 刊記가 刻入,卷末에는 ‘洪熙乙巳秋七月壬申門入…成均館大司成密山卞季良敬跋’이 붙어 있다. 前者에 該當하는 小形本은 李丙壽博士가 發表한 今西龍舊藏本(天理大學現藏本)(16) 以外에 金完燮氏藏 覆刻本을 實査하였다.그 覆刻은 朝鮮朝 後期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책머리에 ‘洪熙乙巳夏晋州牧夏繡梓'의 原刊記와 卷末에 ‘卞季良敬跋’이 붙어 있고, 半葉의 匡郭크기와 行字數등의 版式이 今西舊藏本과 一樣하다. 前揭한 晋州初刊本과 比較해 보면 크기가 훨씬 작고 行字수도 다르며 또 前·後集이 <병0x62C4>錄되어 있다. 이 點으로 보아 이것은 初刊本을 覆刻하고 이에 後集을 追刻한 것이 아니라, 別途로 다시 板下書를 마련하여 上梓한 것임을 알 수 있다. 後者에 該當하는 中形本도 金完燮氏藏本에서 實査하였다. 下向黑魚尾와 黑口가 한 雙이 되어 나타나 있고 紙質이 古한 世宗朝 무렵의 刊本으로 여겨진다. 이것 또한 別途로 板下書를 마련하여 刊行한 <참0x7489>本이다. 그런데 問題는 같은 해에 과연 同書의 2種이 刊行되었을까하는 點이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乙巳 年에는 初刊本에 準據한 小形本이 刻印되었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矮小하여 그 뒤 다시 좀 크게 改書上梓하고 刊 記와 跋文을 그대로 轉刻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刊行의 先後問題는 後日의 詳考로 이 루어 두거니와, 이 晋州後刊本의 特記事項은 陽村이 歿한 뒤에 나온 遺稿가 그의 아들 權蹈의 주선에 의해 ‘後 集으로 追加된 點이다. 이 後刊本의 上梓經緯에 관하여 는 權蹈가 慶尙道 經歷 朴融에게 그 刊行을 委囑 하였더 니 舊·新의 監司 李叔畝와 河演이 이를 도와 鄭陟에게 板下書를 쓰게 하고 牧使 李穗와 利官 潘茂良에게 監督케하여 晋州에서 再刊하였다고 卞季良의 跋에 傳해진다. 그 해가 바로 世宗7年(1425) 7月에 該當하고, 初刊本이 나온지 28年 뒤가 되며, 著者가 歿한지 16年 뒤가 된다. 다. 浪州(扶安) 本 浪州는 全羅北道 扶安郡의 古稱이며, 이곳에서 刊行된 圖說에는 ‘時嘉靖旅蒙大荒落皐攝提 仁川後裔蔡無逸謹 跋于浪州近民堂’의 跋이 있다. 族蒙 大荒落은 乙巳, 皐攝提는 5月寅日이므로 嘉靖乙巳5月이며 仁宗元年(1545) 5月에 該當한다. 그 跋에 의하면 全羅道觀察使 沈光彦이 赴任初에 晋陽本 一秩을 얻어 보고 그 字劃이 아주 작고 또 殘缺이 많음을 遺憾스럽게 여겨 無逸에게 改書하여 再梓할 것을 委囑했다. 그래서 그는 訛舛을 考正하 고 舊本보다 좀 크게 써서 刻印 하였다고 傳해진다. 傳存本으로서 일찌기 李丙博士가 發表한 것에 權重顯氏 藏本과 日本內閣文庫本의 2種이있다. (17)이것들은 手葉의 匡郭크기가 前集은 세로21.5㎝ 가로16.5㎝, 後集은 세로 22.5㎝ 가로16.5㎝이고, 行字數는 共히 13行24字이다. 晋州本과 같이 13行24字로 되어 있으나 크기가 그보다 좀 크기 때문에 글자 또한 그보다 큰 편이다. 前·後集의 版式을 보면 그중 前集에는 晋州後刊本 또는 다음에서 言及할 晋州本과는 달리 ‘前集이란 表示가 없고 다만 後集의 第1圖인 +二月卦之圖의 右側下隅에만 ‘後集'이 陰刻되어 있으며, 前集末에 ‘人學圖說終’의 表示가 있다. 또 匡郭의 크기도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多少의 差異가 있고, 같은 글자에 있어서도 고 그 體가 서로 다른 것이 있다, 이 浪州本보다 2年뒤에 刊行된 榮川本의 黃孝恭跋에 ‘浪州新本缺後集與三峯附篇'이라 있음을 보면 아마도 먼저 晋州初刊本을 底本으로 前集을 刊行하고 몇 해 뒤(적어도 榮州木보다는 늦게) 後集이 晋州後刊本을 底本으로 改書刻印됐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라. 榮川(州)本 榮川本은 浪州本보다 2年뒤에 慶尙道 榮川郡 즉 現榮州郡에서 刊行퇸 冊이다. 그 刊行經緯에 관하여는 卷 末에 수록된 ‘檜山後學黃孝恭跋’에 소상하게 적혀 지고 있다. 嘉靖丁未인 明宗2年(1547) 봄에 慶尙監司安鉉이 榮川郡을 巡視하였을때 黃孝恭의 所藏인 晋陽本一帙을 보고 이를 白雲洞書院(紹朞書院)에 藏하여 諸儲生의 討習에 利用케하고 또 一國에 廣布케 하기 의하여 그 刊行을 該郡守 琴椅에게 委囑하였다. 椅는 이를 기꺼히 여겨 生員琴軸에게 訛<와0x6BE0>를 考證케하고 編夾目錄을 卷端에 붙이게 하는 한편 黃孝赤에게 跋을 쓰게 해서 刊行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刊本은 比較的 많이 傳來되고 있는 편이다. 筆者가 알고 있는 것만도 李丙燾, 金完燮 두분을 비롯한 國立中央圖書館 淸芬室舊藏 內閣文庫 天理大學圖書館의 藏本이 있다. 平葉의 匡郭크기가 세로26.6㎝ 가로18.2㎝, 行字數가 13行24字, 黑口 內向黑魚尾本으로서 종래의 어느 刊本도다 第一 큰 편이다. 또 두드러지게 差異가 있는 것은 첫째로 '十二月卦之圖의 다음에 그 책을 明宗2年에 刊行할때 圖 卦劃의 原形을 고치고 또 補充說明을 刻人한 그림이 하나 또는 두 개 더 실려져 있는 點이다.(18) 두개인 경우는 前者의 說明이 簡略하고 後者는 詳細하여, 하나인 경우는 詳細한 것이 수록되어 있다. 둘째로는 卷末에 陽村의 序와 註를 加한 鄭道傳의 心氣理篇과 心問天答의 2篇이 附載되어 있는 點이다. 마. 咸陽本 慶尙道 咸陽에서 刊行된 책이다. 이것은 明宗9年(1554)에 魚叔權이 엮은 ‘攷事撮要’에 의거 宣祖1年(1568)에 重印한 乙亥字本(19) 所收의 八道程途冊板目錄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冊板은 主로 中宗 明宗年間 그 中에서도 특히 明宗朝에서 開板된 것이 많다. 따라서 이 咸陽本도 그 무렵에 開板된 것이 되므로榮川版과 비슷하게 오래된 古褻本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껏 그 實物을 보지 못하였다. 後日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바. 淸道紫溪書院本 慶尙道 淸道 所在의 紫溪書院에서 刊行된 책이다. 이것은 正祖20年(]796)이 徐有渠기 京·外에 藏壹된 冊板을 調査하여 엮은 ‘鏤板考’에 의한 것이다. (20) 正祖20年現在(21) 그藏版이 缺되어 있는 點으로 미루어 보면 開板以後 어느 程度 歲月이 흐른 것 같다. 그러나 그 開板時期는 넓게 잡아도 17世紀 中葉을 넘지 못할 것이다. 本版은 印紙數가 1牒10張안으로 表示되어 있다. 이 書誌事項은 後日에 實物이 나타나는 경우 그 考證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權五喆私家本 이것은 l929年에 後孫 權泰夾이 本文을 校勘 正하고 그의 아들 權寧庇가 繕寫한 것을 權五喆이 陰城의 自家 에서 私費로 刊行한 것이다. 그 刊行事由는 ‘己巳季夏之月 後孫泰夾謹書'와 ‘先生役後五百二十二年己巳(1929)季夏下澣後孫五喆謹識’에 자세히 적혀지고 있다. 이 책은 半葉의 匡郭크기가 세로20.3㎝ 가로15.5㎝, 行字數가 13行24字註變行, 上果魚尾의 木板本이며 國立中央圖書館에 서 實査하였다. 아. 日本慶安刊本 日本에서 刊行된 책으로서, 이에는 ‘慶安元年十月吉日安田十兵衛開板'의 刊記가 있다. 慶安元年은 1648年 그 러니까 우리 나라의 仁祖26年에 該當한다. 上卷이 前集이고 下卷이 後集이여 主로 榮川本을 근거하고 이에 浪 州 晋州등의 다른 刊本을 參考하여 上梓한 것이다. 半葉의 匡郭 크기는 세로 25.8cm 가로 17.7㎝이고, 行字數는 13行25字이며, 黑口 內向二葉花紋魚尾의 木版本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國立中央圖書館에서도 볼 수 있다. Ⅳ. 本圖說의 價値및 그 評價 첫째, 麗末에 晦軒 安裕(1243∼1306)에 의해 導入된 以後 諸賢儒들이 嫡統을 이어 相傳相受로 發展시켜 온 性理學에 대하여 當時의 眼目으로 그 楮髓와 大要와 본 바탕을 一覽了然하게 圖說해 놓은 開拓期의 力作이다. 後世人의 眼目으로 볼 때 그 內容에 비록 淺薄하고 雜駁하고 牽强附會한 點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엮음에 있어서는 當時의 諸賢들이 천착해온 識見을 두루 參考하여 集約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韓國儒學思想史的인 眼目에서 볼때 開拓期에 있어서의 聖學에 대한 理論的 穿鑿度가 어떠하며 그것이 後世에 어떠한 影響을 끼쳐 어떻게 發展시켰는가를 (23)硏究함에 있어서는 本書를 응당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點에서 本圖說이 지닌 價値는 크게 評價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朝鮮新王朝가 闢佛揚懦의 主義를 새로운 國家理念으로 구축하려는 무렵에 엮어져서 그 理念改變의 一隅 를 도왔음도 또한 注目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本圖說의 著者 權近은 不事二君의 節義를 外面하였다는 後人들의 譏評을 받고 있을 만큼 自己의 生命을 保護해준 恩人 朝鮮太祖에게 그가 닦아 온 儒學者로서의 能力 과 誠意를 다하여 섬겼던 것이다.(24)그러한 知的 活動中 最初의 것이 바로 本圖說이며, 이로 因하여 五經淺見錄 四書五經口訣등이 續撰되었다. 要컨대 新王朝의 理念的土毫構築過程은 물론 陽村에 관한 硏究 특히 그의 思想 的인 硏究에 있어서 本書가 차지하고 있는 比重은 크게 評價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本圖說은 일찌기 麗末群初에 우리 나라의 著名한 儒學者에 의해 著述된 聖學指南이기 때문에 初刊以後 無 數히 刊行되었다. 筆者가 調査해 본 것만도 7回以上이나 된다.그러나 그것이 모두 地方版인 까닭에 罕傳되어 거 의 볼 수 없고 (25)또 그 刊行도 壬辰倭亂以前에 이루어진 것이 大部分이어서 賚料의 稀貴性이 크게 重規되고 있다. 따라서 傳統文化의 開發 및 保存이라는 點에서 보더라도 本圖說은 國學界의 關心과 耳目을 끌게하는 對象이 되는 것이다 註 1) 商麗史 卷107 列傳卷第20 近傳條 太宗實錄 卷17,9年己丑2月丁亥條. 註 2) 權近, 陽村集內 陽村先生年譜. 註 3) 拙藁 , 周易·詩·書淺見錄(國學資料 第10號) p.1. 註 4) 權近, 前揭書 陽村年譜. 註 5) 李滉, 退溪先生文集 卷第2. 註 6) 韓元頀, 南塘集拾遺 卷第4. 註 7) 李珥, 栗谷全書卷 第3l語錄에 있어서도 ‘權近入 學圖似라 評하였음. 註8) 雲峯胡炳文著의 ‘大字指掌圖’가 있으며, 南塘集 雜著에 있어서는 ‘夫性發爲情 心發爲意 日是胡 氏之謬見 而非程朱本意也'라 하여 權近의 說이 胡氏의 ‘大學指掌圖'에서 비롯한 <습0x67DC>見을 踏襲 하였다고 評하였음. 註9) 李滉,前揭書 卷7, 進聖學十圖<답0x5B24><병0x62C4>圖 大學經. 註10) 朱子大全 卷第15. 註11) 十二月卦之圖에 관한 說明에 ‘右復垢陰陽出人消長之幾也 三峯鄭公嘗作此圖以示學者라 있음 註12) 李丙壽, 權陽村の入學圖說に就いて(下)(東洋學報 18-1) p. 120 註13) 鄭道傳, 三峯集 卷第10. 註14) 蔡無逸跋의 ‘得晋陽刊 本壹袂以覽 則字畵過細’參昭. 註15) 李仁榮, 淸芬室書目 卷第1에도 太祖六年丁丑晋陽府刻本이 있음. 註16) 原三七, 今西博士蒐集朝鮮開係文獻目錄 子部p.140에도 收錄되어 있으며, 現在 天理大學에 所藏되 어있음. 註17) 李丙壽, 前揭書(東洋學報17--4 ) pp.130∼134 註18) 文尾에 ‘嘉靖丁未<갈0x538F>月日重校의 表示가 있음. 詛19) 宋錫夏舊藏 澗松文庫現藏 降慶二年刊 乙亥字本攷事撮要 參考 註20) 徐有集, 鏤板考 卷第2 經部 總經類. 註21) 櫓補文獻備考 卷第245 藝文考4 ‘鏤板考七卷 正祖丙辰 命徐有梨編’ 參照. 註22) -例로서 三峯集渠卷第12末의 ‘學者指南圖佚’도 聖學指南圖의 最先本으로 여겨지는 것이므로 이 러한 것을 參考하였을 것이다. 註23) -例로서 圖說類에 影響을 끼쳐 發展시킨 面만을 보더라도 續入學圖說, 作聖圖論, 天命圖說新舊 二圖, 心性情圖를 비롯한 各書·經의 圖說을 續出케하여 聖學의 理論的體系의 發展에 크게 寄 與하였음. 註24) 太宗實錄 卷8,4年甲申12月丙寅 및 17,9年巳丑2 月丁亥條. 註25) 世宗實錄卷59,15年癸丑2 月庚巳條의 成均館司藝金泮上疏를 보면 禮記洩見錄과 같이 易詩書春 秋淺見錄과 入學圖說을 鑄字所에서 刊印할 것을 仰乞하였으나, 결국 實踐을 보지 못하고 地方官 衙에서만 上梓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成均館大學校敎授〉 (페이지 20에서 계속) 上謂安崇善曰 凡中外官吏 折獄之際 不胄明愼 以死爲生者 間或有之 如莫山象伊之事 是己言之痛心 其令 集賢殿 抄錄歷代斷獄之失 鄕亦抄江湖紀聞內誤斷刑獄者 以聞予欲下敎曉論 雪菴法帖 (世宗卷52 13年辛亥6月甲午:3-320上右) 頒賜新刊雪奄法帖于宗親 政府六曹代言司集腎殿等官 <선0x6610>刑敎旨 (世宗卷52 13年辛亥 6月甲辰:3-324下左) 刑曹啓 今頒降恤刑敎旨 己令鑄字所 印出頒諸中外 然恐紙本製破或遺失 請今京中 用刑各司 外方各官 板榜張掛 其元本解由傳與從之. 太宗實錄 (世宗卷52 13年辛亥6月乙巳:3-325下右) 上謂代言等曰 近來 未納史草者幾人 何以罰之 金宗瑞對日 修太宗實錄時未納者 裴仲倫. 金漢老, 李升商, 朴錫命 也 法當 懲銀二十雨 禁錮子孫 錫命, 升商 以功臣 故免子孫罰 仲倫, 漢老 則禁錮子孫 但免銀耳 上曰 前此受 罰者幾人 宗瑞曰未知 上曰 欲用漢老之子 敬栽何如 考古制以聞 安崇善啓 漢老曾犯不忠 又失史草 何不據法 以廢 萬世之當典乎 上曰 漢老雖曰不忠 其實曖昧 漢老之心 惟恐謙寧 不愛女子之故也. 恤刑敎旨 (世宗卷52 13年辛亥6月辛亥:3-326上左) 頒賜新印 恤刑救旨于京外官 及宗親 東班五品以上 西班三品以上. 大明律·唐律疏義·議刑易覽 (世宗卷52 13年辛亥6月甲寅:3-326下左) 知申事, 安崇善 左代言, 金宗瑞等啓 大明律文 語意難曉 照律之際 失於輕重 誠爲未便 乞以 唐律疏義, 議刑易 覽等書 參考譯解 使人易知 上曰然 錄其可編輯人各以聞. 經濟禮典 (世宗卷52 13年辛亥6月丁巳:3-327下左) 大司憲申궐等 上疏曰 體, 婦人 簪不遊庭 無故不出中門 所以謹婦道也 本朝 經濟禮典內 丙班婦女 除父母, 親兄弟 姉妹, 親伯叔姑, 親舅姨外 不許往見 違者 以失行論…… 至正條格 (世宗卷53 13年辛亥7月丙寅:3-329上左) 集賢殿啓 今考至正條格 中統擧旨內一款 諸告人罪者 皆須明註年月 指陳社事 不得稱疑 誣告者 抵罪反坐…… 文獻逋考:續六典 (世宗卷53 13年辛亥8月己亥:3-334下左). 兵曹啓 今考文獻通考 兵部 掌天下城池 續六典 兵曹武備司掌中外甲兵 鎭戎城堡之事 工曹 營造 司掌宮室城池 工 役之事 古今之制皆同 講自今 凡審其要害 設置城堡 守禦等事 本曹掌之 築新城 修舊城等事 工曹掌之從之.
청구번호_정렬04_C02-0009A
자료분류고서 > 장서각 수입본 > 子部 > 儒家類
CLASSCODEJBCB
PDF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