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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도사증이조참의윤공묘갈명(義禁府都事贈吏曹參議尹公墓碣銘)

자료명 의금부도사증이조참의윤공묘갈명(義禁府都事贈吏曹參議尹公墓碣銘) 저자 윤이명(尹以明), 조진관(趙鎭寬), 유한지(兪漢芝), 유한지(兪漢芝), 미상
자료명(이칭) 의금부도사증이조참의윤공묘갈명(義禁府都事贈吏曹參議尹公墓碣銘) 저자(이칭) 조진관(조선)찬;유한지(조선)서병전(趙鎭寬(朝鮮)撰;兪漢芝(朝鮮)書幷篆) , 趙鎭寬(朝鮮) 撰
청구기호 PB14B-84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민간/구입본/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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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미상 (현재주소: 미상)
· 작성시기 1799
· 비고 B41B-84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윤이명(尹以明)
조진관(趙鎭寬)
유한지(兪漢芝)
유한지(兪漢芝)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36.2 X 23.8
· 판본 첩장본(帖裝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첩 28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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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윤이명(尹以明)의 묘갈명 탁본을 절첩으로 장황한 금석첩.
원자료제목
· 표제의금부도사증이조참의윤공묘갈명(義禁府都事贈吏曹參議尹公墓碣銘)
내용 및 특징
1799년(정조 23)에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 윤이명(尹以明, 1629~1682)의 행적과 인품을 기리고 그의 선조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서술한 묘갈명이다. 표지는 푸른색 격자무늬로 되어 있고 표제는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전서와 예서로 되어 있으며 서예로 유명했던 유한지(兪漢芝) 서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윤이명의 증조부인 윤섬(尹暹, 1561∼1592)과 아버지인 윤계(尹棨, 1583∼1636), 숙부인 윤집(尹集, 1606∼1637)은 세간에 ‘윤씨삼충공(尹氏三忠公)’이라 불릴 만큼 충신이었다. 윤섬의 자는 여진(汝進)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1583년(선조 16)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주서·정자·교리·정언·지평을 거쳤다. 1587년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된 명의 기록을 바로 잡았는데, 그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이 되었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교리로 순변사 이일의 종사관이 되어 적과 싸우다 상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윤계의 자는 신백(信伯)이고 호는 신곡(薪谷)·임호(林湖)이며 윤형갑(尹衡甲)의 아들이며 윤집의 형이다. 1627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교리·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남양부사로 재직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려다 포로가 되어 참살 당했다.
윤집은 3학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자가 성백(成伯)이고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이다. 1631년(인조 8)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설서·이조정랑·부교리를 두루 거쳤다. 그가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화의를 극력 반대하였다. 병란이 끝난 후에 척화론자로 심양에 잡혀 가서 처형되었다.
윤이명은 윤계의 아들로, 병자호란에 아버지와 형을 모두 잃었다. 그의 자는 문숙(文淑)이며 호는 취선(醉仙)이다. 효종 때 왕의 특지로 참봉(參奉)에 올라 1660년(현종 1) 군위현감(軍威縣監)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고 전서·예서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조참의가 추증되었으며 편저서에 『삼절유고(三節遺稿)』가 있다.
묘갈명을 지은 조진관은 본관이 풍양(豊壤)이고 자는 유숙(裕叔)이며 호는 가정(柯汀)이다. 조엄(趙曮)의 아들이다. 1762년(영조 38)사마시에 합격하여 입사했는데 1776년 아버지가 홍국영 일당으로 인해 누명을 쓰자 신문고를 쳐서 부당함을 호소했다. 아버지의 사후에도 누명을 벗기기 위한 소를 계속 올림으로써 1794년에 이루어졌다. 1805년 이후 수원부유수를 거쳐 판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글씨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서자 겸 전서자인 유한지(1760~?)는 본관이 기계(杞溪)이고 자는 덕휘(德輝)이며 호는 기원(綺園)이다.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일대에 이름이 높았다. 『근역서휘』·『근묵』 등에 전하는 그의 진적을 보면, 당시 중국과의 빈번한 내왕에 따라 전래된 비첩을 본격적으로 익혀 고법을 충실히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남양윤씨 집안의 삼충신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전말을 알 수 있으며, 특히 16~18세기의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상황과 인물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또한 유한지의 서체도 살펴볼 수 있어 조선 후기 서예사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참고문헌

『三節遺稿』, 『柯汀遺稿』, 『景宗實錄』,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槿域書畵徵』 / / 『국한문역 帶方世家言行錄』 / 윤행임 저, 이봉래 역 / 교문사, 1986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Ⅵ』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8.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Ⅱ-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5.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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