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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루연가(옥누연가(玉樓宴歌))

자료명 옥루연가(옥누연가(玉樓宴歌)) 저자 [著者未詳]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4-6776 MF번호 MF35-1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集部/詞曲類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서지 전자도서관 해제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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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처전자도서관
번호114561
서명옥누연가
저자[著者未詳]
판사항寫本
간사사항[寫年未詳]
청구번호K4-6776
MF번호MF35-1
형태사항線裝 1冊(27張):無郭, 無絲欄, 半葉 9 行字數不定, 註雙行, 無版心;32.2 × 0.2 cm
인기印 : 藏書閣印
안내정보
해제玉樓宴歌 李明九 〔著者未詳] 寫本.〔英祖年間] 1冊(27張) 無郭, 無絲欄. 半葉9行字數不定, 註雙行. 無版心. 32.2×30.2㎝ 線裝. 表題: 玉樓宴歌. 印: 藏書閣印. 紙質: 楮紙. 이 玉樓宴歌는 單卷으로 되어 있는 筆寫本인데, 이 作品은 언제 누가 지었는지 그 作者와 製作年代를 正確히 알 수는 없으며, 또 어느 때 누가 筆寫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第5面에 가서 동일우 됴션국의 례악문물 빈빈다 단군긔 린덕화 쇼듕화 되여스라 아태조 홍공위녈 삼이샹 셩군이라 년 죵샤경이 셩신손 계계샤 라는 句節이 있어, 朝鮮國을 紹介하는 部分이 나오는데,여기서 〈년 죵샤경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이 作品을 썼을 무렵은 李朝 開國 400年 前後에 해당하는 때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李朝의 建國이 正確하게는 1392.A.D.이고, 그 후 正確하게 400年째는 1791A.D.즉 正祖 15年인데, 勿論 이 作品에서 말한 “四百年來”라는 말은 그리 正確한 年數를 두고서의 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흔히 크게 햇수를 말할 때에는 예컨데,100年 未滿을 두고 100年이라 부르고 200년 未滿을두고서 200年이라 부르며, 半萬年 未滿을 두고서 半萬年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例가 慣習上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400年도 이 필시 400年 未滿의 햇수를 두고서의 말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이 作品의 年代는 大<체0x759C>的으로 따져서 英祖때가 거의 틀림없겠으며,無理를 해서 내려와 보았자 正祖 初年이 或 可能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筆者로서는 이 作品의 製作年代는 英祖때로 보아둠이 妥當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 作品의 形式은 이른바 歌辭體로서 總 950句로 되어 있다. 우리가 歌辭文學이라고 부르는 文學形態는 李朝에 들어와서 비로소 形成된 것으로 본다. 그 形成過程에 대하 여는 學者들 사이에 아직도 異論이 紛紛하다. 여기서는 그에 關해 擧論함 必要가 없다. 最初의 作品은 李朝 成 宗때 丁克仁에 의해 지어진「賞春曲」이라고 指目하지마는 이에 대해서는 그 眞<안0x68E2>을 두고 또 여러 말이 있기도 하 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또한 여기에서 論할 必要는 없다. 다만 歌辭文學의 全體的인 어느 特色이나 傾向에 대해서는 여기에 잠깐 論할 必要는 있다고 본다 우리는 歌辭文學을 크게 前期와 後期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宣祖 壬亂을 中心으로 하여 그 以前을 前期,그리고 그 以後를 後期로 區分하기로 한다. 元來 歌辭體는 그 形式이 四四調의 連#體라고 -般的으로 이야기되지마는, 前期歌辭는 오히려 四四調보다 三四調가 훨씬 支配的인 形式임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言及한 最初의 作이라 指目되는 賞春曲도 그렇거니와, 歌辭文學의 最高大家라고 불리우는 松江 鄭徹의 作品을 보아도 역시 三四調가 월등하게 優勢하며, 前期歌辭의 끝이라고 볼 蘆溪 朴仁老의 作品에서도 四四調보다는 三四調가 優勢함을 우리는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三四調가 支配的인 前期歌辭는 보다 더 短型이며, 따라서 百句 以上으로 늘어나는 일이 그리 흔치 않으며, 보다 더 詩歌的인 性格을 띄어, 노래할 수 있는 詩歌로서의 性格을 지니고 있으며, 內容 또한 抒情이 主가 되는 그러한 性格을 지니고 成立해 있었음을 본다. 宣祖朝를 고비로 하여 歌辭文學은 一旦 그 勢力이 衰弱해져서 文學史上 이렇다 할 作品이 그리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韓末에 가까워 오면서 여기 歌辭文學은 다시 그 性格을 바꾸어 가지고 크게 登場하게 된다. 그러한 時期를 國文學史上에서는 大略 英祖때를 그것으로 삼아 온다. 이 時期에 들어오면 歌辭文學은 從來의 三四調를 벗어나 이제는 거의 全 作品에 걸쳐 四四調가 支配的인 律調로 나타나게 된다. 勿論 그렇다고 해서 三四調를 전혀 안 쓴다는 것은 아니다. 間間 三四調가 混在해 있기도 하지만, 거의가 四四調로 정돈되어 있다. 이와 같이 四四調를 支配的인 律調로 쓰고 있는 後期歌辭는 前期에 比해 그 形態가 엄청나게 長型化한다. 우리는 前期歌辭를 보다 더 短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一篇의 作品이 百句를 넘는 일이 흔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 後期歌辭는 엄청나게 長型化하여 한 作品이 數百句로 되어 있음은 極히 흔한 일로 나타나 있다. 作品에 따라서는 數千餘句로 되어 있는 것도 足히 볼 수 있는 事實이다. 그 時期는 歷史的 乃至 時代的인 潮流에 영향을 입어서의 일로 생각되지마는 當時 澎湃히 일어났던 散文精神의 영향을 입어, 여기 後期歌辭는 從來의 보다 더 詩歌的인 性格에서 脫皮하여 보다 더 散文的 性格으로 變質하여 登場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前代와는 달리 매우 長型化하는 가운데 散文的 精神에 基盤을 두고 創作되 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그 內容 主題도 前代와는 다른樣相을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散文에 담으면 알맞을 主題들이 大部分이다. 이 時代의 代表的인 作品을 들어본다면, 金仁謙의 日東壯遊歌, 洪淳學의 燕行歌, 漢山居士의 漢陽歌, 金鎭衡의 北遷歌, 作者未詳의 開東壯遊歌등등을 들 수 있겠는데, 日東壯遊는 英祖 39年 8月 3日 서울을 떠나 다음 해 7月8日 復命한 約 1年에 걸친 日本 來往의 紀行을 적은 것으로 총 八千百句의 長篇이며, 燕行歌는 高宗 3年 嘉禮冊封 奏請使의 書狀官으로 隨行했던 洪淳學이 지은 中國來往의 紀行을 적은 총 三千九百餘句의 長篇 紀行文이고, 漢陽歌는 年代가 正確하지는 못하나 大略 憲宗 10年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漢陽의 文物制度를 그린 총 -千六百餘句의 作品이며, 北遷歌는 金鎭衡이 哲宗 4年 7月에 明用定配를 當하게 되자, 그 明用配所에서의 生活을 그린 이른바 流配文學의 白眉로서, 이 역시 千餘句로 된 作品이며, 關東壯遊歌는 哲宗年代의 作品으로 推測이 가는 作品인데, 金剛山을 中心으로 하여 關東地方의 華麗한 風景을 그린 역시 千數百句로 된 作品이다 이와 같이 後期歌辭는 엄청난 長型化에 紀行文, <서0x65B2>景,文物制度등 多分히 散文的 素材를 두고 쓰여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題目에 ××歌라고 歌字가 들어있기는 하여도 이제는 노래라는 事實과는 먼 거리에서 다만 四四調라는 韻文의 形式을 빌었을 뿐, 散文的 觀念을 가지고 創作하였었음을 알아야 할 둣 하다. 後期歌辭가 위와 같은 性格일진데, 여기 玉樓宴歌도 바로 그러한 後期歌辭의 하나라고 指目 아니 할 수 없다. 前述한 바와 같이 形式은 四四調가 支配的이요, 後期歌辭 치고는 좀 짧은 듯도 하나 그러나 950句라는 長型이요, 또 그 內容도 玉樓에서의 宴會 장면을 그린 多分히 散文的 性格임을 볼 때, 後期歌辭의 範疇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본다. 한편 앞에서도 引用한 바와 같이 “四百年來 云云"의 句節로 보아 製作年代가 大略 英祖때로 推測되는만큼, 이 作品이 後期歌辭에 屬한다 함은 分明한 事實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있어 이 作品의 內容은 어떠한 것일까? 題目이 玉樓宴歌라고 되어 있는 데에서 짐작이 가듯이 이 作品은 이른바 玉皇上帝가 居處한다고 하는 玉樓에서는 경사스러운 宴會의 빛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玉樓라는 것은 事實上에 있어 存在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보니, 作者는 꿈에 王을 따라 玉樓에 올라 그 宴會에 參席하였다라는 것으로 하여 놓고, 그 玉樓宴의 이 光景, 저 光景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이 作品은 꿈속에서의 일을 그린 一種의 玉樓宴幻想曲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 作品을 읽고 우선 느낄 수 있는 事實은, 이 作者는 中國의 歷史와 歷代 文物 文化등에 相當히 해박한 知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古今을 通한 歷史的 事實이며 人物들의 이름이 수없이 列擧되어 나오는데, 모두가 中國 歷史上에 있어 널리 알려진 有名한 人物들이며 事實들이다. 이런 面에서 볼 때, 이 作者의 知識은 主로 中國 歷史나 文化에 偏重되어 있다는 事實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反面에 이른바 朝鮮國에 關한 것은 너무나도 적게 그리고 簡略하게 記述되어 있다. 도시 그 玉樓宴에는 中國側으로는 歷代 帝王으로부터 有名한 學者, 文人, 武臣, 書藝家, 畵家 심지어는 이름 있는 美女 佳人들까지 登場해서 모두 한구석을 차지하여 登場하는데, 朝鮮國側으로는 朝鮮國王과 그 國王에 隨行했다는 몇몇 臣下및 作者 外에는 전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 나라에도 有名한 學者며,英雄이며 將軍도 있었겠는데, 그들은 도시 이름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參席했다는 國王도 겨우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뿐,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어찌 보아서는 主<체0x759C>性을 喪失한, 中國文物에만 陶醉한 當時人들의 어느 그릇된 一面을 보이는 듯도 하여 그리 탐탁한 일은 못된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하기는 玉樓라는 이 假想的 地境을 생각해 낸 고장이 中國인 탓도 있겠지마는 中國을 크게 내세우고, 그 어느 한 그늘에 自身을 位置시킨 作者의 態度는 當時의 歷史的 條件으로 미루어 或은 不可避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內容의 줄거리를 그 順序를 따라 略述하면 다음과 같다. 開卷 첫머리에서는 우선 中國歷史의 이야기가 簡略히 紹介되어 나온다. 텬황디황 벽후의 인황구쥬 분都? 쳔만고 흥망젹 남가일몽 아니런가 이라 하여 天皇氏, 地皇氏, 人皇氏부터 列擧하고 다음에 복희신농 황톄요 졔텬닙국 신후의 사도지직 젼악관이 샹셔교 여러내여 문逃稿?분별고 례악교화 션포니 문물이 혁혁고 풍쇽이 회회다. 라고 하여 伏羲, 神農, 堯 舜등이 나타나 文章 貴賤 分별하고, 禮樂敎化를 宣布하여 文物이 赫赫하고 風俗이 밝게 빛남을 말하고 있다. 天地 개벽후의 文物 制度의 정비되어감을 前言하였듯이 中國의 古代歷史부터 풀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禹에 이어지고 殷湯을 거쳐 周公을 지나 春秋에 이르니 츈추시졀 혼난여 난신젹 분분니 니구산 됴혼원긔 텬죵셩인 니러나서 라고 하여, 尼丘山 좋은 원기 云云에서 孔夫子의 出現을 말하고 있다. 다시 秦始皇, 漠高祖, 唐朝, 宋, 大明까지의 文物을 간략히 紹介하고,5面에 가서 해동일우 됴션국의 예악문물 빈빈다 단군긔 린덕화 쇼듕화 되여스라 아태조 흥공위녈 삼이샹 셩군이라 년 죵샤경이 셩신손 계계샤 쳔년황하 일?운의 태평셩쥬 겨시거다 요디일윌 건곤이 그에 엇더텬고 강구연월 격양가와 훈련남풍 오현금을 오날 다시보니 긔아니 거륵가 라고 하여 海東一隅 朝群國이 琫樂文物이 彬彬하며, 檀君 箕子의 내린 德化에 小中華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역시 당시 이 땅의 人士들이 中國을 崇尙하여, 스스로는 小中華로 滿足했었던 態度가 여기에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中國歷史의 큰 흐름을 간결히 말하고, 또 우리 朝鮮國의 歷史를 짤막하게 紹介하고는 곧 이어서 어제밤 꿈을꾸니 엇디그리 황홀고 옥황샹뎨 하됴셔 텬하후왕 됴회니 우리셩쥬 승명샤 뉵뇽어천 옵신다 삼공뉵경 시위고 오군문이 죵니 쳔승만긔 옹호고 팔난화명 이라 일개쇼신 미쳔공이 을 타고 슈가여 라고 하여 玉皇上帝가 天下侯王을 朝會하나 이에 朝鮮國王도 六龍御天하여 三公六卿을 거느리고 上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參加한 여러 侯王들의 座位,聖인·異端學者, 山林處土, 天下英雄, 文武諸臣, 忠臣烈士 그리고 音樂, 舞踊다음에 罷宴曲으로 宴會는 끝나고,朝鮮國王은 上帝의 命을 받아 掃宮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以上을 綜合하여 볼 때, 中國文物에 대한 崇尙과 小中華로 自處하는 이 고장의 態度가 玉樓宴이라는 幻想으로 表規되어 있다 할 것이다 <成大敎授·文學博士> 〈페이지 7에서 계속〉 疏, 春秋左傳注疏, 孟子注疏, 爾雅注疏, 孔子家語,山海經, 龍魚河圖, 說文(許愼), 說文解字(徐鉉), 方言(楊雄), 釋名(劉熙), 三蒼解話(郭#), 玉篇(顧野王), 唐韻(孫#), 廣韻(張參), 類篇(司馬光), 爾雅翼 (羅願), 六書故 (載<동0x5C15>), 書苑 (王世貞 ), 字彙 (梅膺祚), 正字逋 (張自烈 ), 字典 (張玉書等), 漠漬 文鑑 (李洙等 }, 史記, 史記正義(張守節), 前漢書, 後漢書, 三國志, 晋書, 宋書, 北史, 隨書, 唐書, 宋史, 金史,元史, 明史, 魏暑 (魚券), 華陽國志 (常據), 三國史(金富軾). 高麗史 (鄭麟趾等), 龍飛御天歌 (鄭麟趾等),國朝生鑑{當守朝諸臣), 懲毖錄(柳成龍), 倭志 (李日華 ), 日本記(藤原緖嗣), 萬姓統譜(凌迪知), 列士傳(劉向), 逸士傳 (皇甫諡), 西京裸記 (葛洪), 鄭中記(陸歲羽), 明一統志(李賢 等), 寧波府志(張時徹), 陜西通志(伍福), 輿地勝覽(盧思愼等), 通典(杜佑), 通志客 (鄭樵), 明會典(申時行等), 禮器圖氏(乾隆諸臣),五禮儀(成宗朝 諸臣),樂學軌範(成俔等),經國大典(崔恒等) 續大曲 (徐宗工等), 文獻備考 〔英宗朝 諸臣),莊子, 列子, 管子, 准南子, 春秋繁露(董仲舒), 論衡王充), 風俗通義(應교), 易林(集#), 六韜(太公),李衛公問對(李靖), 武經總要(胄公亮等), 武編 (唐順之), 紀效新書(戚繼光), 登壇必究(王鳴鶴), 武備志(茅元儀), 兵略箋聞(瞿汝稷) 刀斂錄(陶弘景), ,馬菜譜(梁簡文帝), 兵仗記(王晫), 蹴鞠譜(汪雲程}, 小林棍 法闡宗(程宗猷,)內家券法(黃百家), 齊民要術 (賈思#). 農政全書(午象晋), 名醫別錄(陶弘景)本草拾#陳藏器), 圖經本草(蘇頌) 本草綱目(李時珍),別錄(劉向), 古今注(崔#), 中華古今注(馬縞), 博物志(張華) 廣博物志(董斯張), 灸穀子錄(王叡), 淸異錄 (陶穀), 南豊<잡0x6FE6>記(##), 夢溪筆談(沈括), 老學菴筆記(陸游), <상0x657D>素<잡0x6FE6>記(黃朝英), 月鉛總錄(楊愼), 識小編(周賓所), 日知錄 (顧炎武), 因樹屋書影(周亮工)二儀實錄 (劉孝孫), 事物紀原(高承), 續事始(馮 鑑), 事物原始(趙鉉 ), 和名抄 (倭人所纂), 拾遺記(王十年 ), 靈鬼志(荀氏), 敎敖記 (催令欽), 初學記(徐堅等), 玉海( 王應麟), 三才圖會(王折), 三才圖會續集(王思義), 圖書集成(蔣廷錫等), 天工開物(宋應星),倭漢三才圖會(艮安尙順), 杜工部集(杜甫),院花集 (韋莊), 六一居士集(區陽脩), 大全集(朱子) 友石山房藁(王紡〉, 合州四部藁 (王世貞), 西厓集(柳成龍), 象邨集(申欽) 文選(梁昭明太子), 賦彙(陳元龍),列朝詩輯(錢謙益), 明詩綜(朱彛尊), 樂府潗錄(文昌孫) 中山詩話 (劉筠) 한편 各技마다 兵器에 對한 圖說을 부쳐 部分名稱을 表示하고 本文 下端欄에는 精巧한 版畵로 한 動作 한 動作에 對하여 圖示解說하고 끝에 總譜와 總圖로 綜合動作을 一目僚然하게 解詵하였다. 이제까지 本書에 對한 槪括的인 紹介로서 當時의 「武藝」에 對한 것을 살펴보았다. 現代에 이르러서도 國家安保와 國力의 培養이 어느 때보다도 時急히 要請되는 때에 現時의 技術보다도 發達되지 못한 初創期의 「武藝」라 할지라도 古典으로서의 價値와 「武藝」의 發展史的 意義로 보아 貴重한 史料라 믿어 여기에 紹介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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