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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집(醇庵集)

자료명 순암집(醇庵集) 저자 吳載純(朝鮮) 撰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4-6226 MF번호 MF16-423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集部/別集類/詩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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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처전자도서관
번호113955
서명醇庵集
저자吳載純(朝鮮) 撰
판사항丁酉字版
간사사항純祖8(1808)
청구번호K4-6226
MF번호MF16-423
형태사항線裝 10卷 4冊:四周單邊, 半郭 25.2 × 17 cm, 有界, 半葉 10行 18字, 註雙行, 上二葉花紋魚尾;33.9 × 21.9 cm
인기印 : 茂朱赤裳山史庫所藏 … 本, 李王家圖書之章
안내정보
해제순암집(醇庵集)

〈정의〉
本書는 朝鮮王朝 正祖 때의 文臣이요 性理學者인 醇庵 吳 載純(1727∼1792)의 詩文集이다.


〈서지사항〉
전 10卷 5冊으로서, 卷末에 있는 著者의 從子(실은 著者의 親子로서 아우 載紹에게 出系함)인 老洲 吳 熙常의 跋文에 의하여 本書의 編成 경위를 보면, 本書는 正祖의 下敎에 의하여 刊行되었음을 알 수 있다. 著者는 少時에 文辭를 좋아하고 馳騁하지 않아 當世에 이름이 있었는데, 中歲 이후부터는 外華를 거두어들이고 內行에 힘써 著述로 자처하질 않았기 때문에, 그의 詩文이 强半이나 散佚되어 없어졌으며, 그가 下世하여서는 子弟들이 遺稿를 모아 繕寫했으나 平日 著者의 沖謙하던 뜻을 본받아 감히 剞劂할 계획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즈음, 正祖가 遺稿를 徵覽하고 下敎하기를

“근일 齋居하던 중 故 閣臣 吳醇庵의 私藁를 披閱하니, 調格이 深沆 重厚하여 少時의 詩文은 왕왕 絶等한 곳이 있었다. 少年 閣臣의 무리로서 스스로 依倣作家하는 이들이라도 그 氣味 意匠을 본받고자 하나 반드시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저, 吳醇庵은 韜晦를 잘하여 文章의 深淺을 아는 이가 적으니 빨리 剞劂에 부쳐 세상에 流行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은 下敎를 받들어 熙常 등이 다시금 刪定을 더하여 정리 편집했든 것이며, 純祖 8年(1808)에 鐵字로 간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活字는 이른바 丁酉字로서, 本書는 印刷나 製冊이 모두 整齊하고 保管狀態도 매우 良好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本書는 원래의 遺稿에 다시금 刪定을 가하여 精選한 것임을 알 수 있거니와, 수록된 내용은 賦 2首, 詩 289首, 文 174首, 雜識 174則으로서, 그 目次를 槪觀하면 다음과 같다.

卷之 1, 賦·詩.
卷之 2, 詩.
卷之 3, 䟽·箚 및 冊文·祭文등 應製錄.
卷之 4, 書·序.
卷之 5, 記.
卷之 6, 題·跋·銘·贊·祭文·哀辭.
卷之 7, 碑·神道碑·墓碣銘·墓表
卷之 8, 墓誌銘·行狀·謚狀·遺事.
卷之 9, 雜著.
卷之 10, 雜識.

이 가운데, 雜著는 解·說·記事·論·辨·原 등의 各體文이며, 詩文이 매우 簡潔하고 古意가 있어서 文學的 價値가 있음은 물론, 䟽·剖·序·跋이나 각종 金石文字는 當時의 政治·社會의 現實을 알려주는 史料로서의 가치도 적지 않다. 특히 그의 性理學者로서의 面貌는 卷之九,十의 雜著·雜識에서 찾아볼 수 있거니와, 本詩文集외에 그의 著述로는 周易會旨 6卷, 玩易隨言 2卷, 讀起疑 1卷, 聖學圖 1卷이 따로 있다. 이와 같이 그는 經書學, 특히 易學에 造詣가 깊었으니, 수십 년에 걸쳐 이 방면에 돈독히 致工하여 諸家의 說을 綜節한 것이었으며, 本書의 雜識 174則의 내용도 대부분이 易學을 중심으로 한 經學에 관한 그의 見解를 서술한 것이다.

〈체제 및 내용〉
著者 吳載純은 字를 文卿, 號를 醇庵 또는 愚不及齋라 하였으니, 이 號들은 모두 正祖의 賜號로서, 本書에 賜號記가 실려 있거니와, 당시 그에 대한 王의 際遇가 매우 융숭했던 일을 짐작할 수 있다. 本貫은 海州로서, 曾祖父인 陽谷 吳 斗寅은 肅宗 15年(1689) 이른바 己已換局 때 李 世華·朴 泰輔와 더불어 上䟽 直諫하든 끝에 立節 殉死한 일로 유명하고, 祖父는 顯宗의 駙馬인 海昌尉吳 泰周이며, 父는 英祖朝의 大提學 月谷 吳 瑗이니, 文翰과 閥閱을 겸비한 당세 굴지의 명문 출신이었다. 英祖3年(1727)에 출생, 蔭官으로 洗馬·郡守등 內外 諸職에 調用됐으나, 대부분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혹 취임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學問을 힘썼다. 그러다가 46세의 晩年에, 즉 英祖 48年(1772)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비로소 官職에 나아가, 正祖 卽位後는 內閣의 閣職을 항시 兼帶하면서, 吏曹·禮曹의 判書, 兩館大提學, 守禦使, 判義禁府事, 議政府右參贊 등 內外 文武의 淸顯 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少時로부터 經傳에 潛心하여 內行이 돈독하였거니와, 官途에 나아간 뒤에도 公暇에는 日夜로 專心潛思하였기 때문에 髭髮이 희어졌을 정도로 항시 學問의 硏鑽에 注力하였다고 한다. 正祖 16年(1792) 66세를 일기로 아무 질병도 앓은 일이 없이 下世하니, 세인이 모두들 仙化했다고 했다 하며, 謚號를 文靖이라 내렸다.

朝鮮王朝 後期의 英·正時代는 자못 文藝復興의 氣運이 높았던 때였다. 朝鮮時代의 性理學이 退溪 李 滉과 栗谷 李 珥를 맞아 그 極盛期를 이루다가 壬辰 丙子 兩次의 倭胡 外侵을 분수령으로 다소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 時代에 이르러 實學이라는 새로운 學風이 學界에 등장하여 꽃을 피우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心性論을 둘러싼 性理學의 論爭이 한창 치열히 전개되어, 이른바 湖洛是非가 분분하던 時期가 바로 이 時代였다. 朝鮮時代의 性理學이 李退溪와 李栗谷의 時代에 이르러 四七理氣論을 중심으로 꽃을 피우고. 이 결과 主理·主氣의 學派가 形成 對立되었음은 周知하는 바와 같다. 그리하여 退溪의 主理說은 嶺南學派에게, 栗谷의 主氣說은 畿湖學派이게 계승 발전되던 중, 嶺南에서는 旅軒 張 顯光·愚伏 鄭 經世 등이 主氣說에 同調하고, 畿湖에서는 農岩 金 昌協이 主理說的 입장을 주창하여 자못 異色을 띄었다. 이런 즈음 畿湖學派에서는 주로 心性의 辨을 둘러싸고 湖洛 兩論이 대립하여 각기 새로운 學派를 形成하기에 이르니, 人物性의 同異 문제를 爭點으로 하여 人物性同論을 주장하는 一派와, 人物性異論을 주장하는 一派의 分立이 바로 그것이다. 前者는 陶庵 李 縡·黎湖 朴 弼周 등의 주장으로서 이들이 모두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이를 洛論이라 한 바, 여기에 湖西人 巍巖 李 柬·冠峯 玄尙璧과 같은 이들이 가세하였고, 後者는 南塘 韓 元震·屛奚 尹 鳳九 등이 주장하였는 바, 이들은 모두 湖西 출신이어서 이를 湖論이라 한 것이다. 이 湖洛是非에서 人物性同論의 淵源을 소급하면 바로 畿湖學派이면서 主理說을지지했던 金農岩에게 귀착되는 바, 이들은 대체로 退溪나 栗谷의 어느 一說에 치우치지 않고 折衷的인 태도를 취하면서, 主理·主氣의 兩說에 대하여는 主理說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本書의 著者 吳醇庵은 이 湖洛是非이서 洛論의 입장에 선 學者였다. 먼저 系譜上 人脈으로 연결지어 보더라도, 醇庵은 洛論 측의 人脈과 매우 가깝다기보다, 바로 그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洛論의 巨頭인 李 陶庵은 바로 吳醇庵에게 大姑夫가 되는 동시에, 金 農岩의 門人이었으며, 醇庵의 從祖父인 吳 晋周는 또한 金 農岩의 女壻이자 그의 門人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이 醇庵의 學問世界에게 직접 간접으로 크게 영향하였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여겨지나, 醇庵의 學者로서의 學問的 경향은 이러한 인맥보다도 그의 著述을 통하여 알아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다음에 本書의 雜著에 수록된 「率性解」에서 그의 心性論을 들어보기로 한다. 그는 「率性解」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率性」(中庸에서 言及된 ‘率性之謂道’의 率性으로서 性을 따르는 것)이란 것은 人·物의 區別이 없이 통틀어 말한 것이다. 「性」이란 仁·義·禮·智로서, 이것은 人·物의 本然의 性이다, 이 「性」을 따르면 이것이 바로 人·物의 道理가 되는 것이다. 朱子가 人의 率性을 말할 때에는 ‘그 仁의 性을 따른다, 그 義의 性을 따른다’ 하면서, 物의 率性을 말할 때에는 ‘그 性을 따른다’고만 하여 仁과 義를 들지 않았는데, 이는 어찌 人과 物의 率性이 다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대개, 이는 또한 마땅히 상세히 해야 할 것은 상세히 말하고, 마땅히 간략하게 해야 할 것은 간략하게 말한 것이니, 요는 마땅히 이것으로 써 저것을 미루어 알아야 할 것인 것이다. 대저, 人·物의 「本性」은 같으니, 이는 五常의 理이다. 그 따르는 바라는 것이란 또한 똑같이 이 本性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禽獸·草木의 動稙物類는그 形氣가 偏塞하다. 그래서, 그 仁·義·禮·智의 性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밖에 發現되는 것이 다만 이와 같은 것(禽獸·草木의 類인 것)에 그칠 뿐인 것이다. 이는 대개 그 「氣」가 같지 않은 까닭이요, 그 「理」가 같지 않은 것이 있어서인 것은 아니다. 이로 보면, 器用·木石·塵芥와 같은 枯槁의 物類들도 또한 별도로 器用·木石·塵芥의 「性」이 있는 것은 아님 것이며, 또한 똑같이 이 「性」을 所有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形氣가 枯槁한 것들은 더욱이 動植物類의 偏塞한 것들보다도 심한 것이 있다. 때문에 그밖에 發現된 것이 또한 다만 이와 같은데 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한 이를 일러 그「性」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이 天에서 稟得한 바라는 것은 진실로 이 「性」이며, 物이 天에서 稟得한 바라는 것도 또한 이 「性」인 것이니,(이것이) 이른바 萬物은 一原인 것이다. 그밖에 發現된 뒤에야 人은 각기(人으로서의) 그 일을 갖게 되고, 物은 각기(物로서의)그 일을 갖게 되어 똑같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萬物의 異體인 것이다. ”

즉, 人이나 物(人 외의 禽獸·草木 또는 器用·木石·塵芥 등)의 구별이 없이 天下의 모든 萬物은 똑같이 天에서 「性(本然의 性)」을 稟得하여 仁義禮智의 四端을 갖추고 있다는, 즉 人物性同을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밖에 發現된 결과가 人·物이 각기 다르게 認識되는 것은 그形氣의 偏全이 있기 때문으로서, 사람만이 온전한 形氣를 품수하여 「五常의 理」를 具現할 수 있고, 反面에 禽獸·草木과 같은 動植物類나, 또 器用·木石·塵芥와 같은 枯槁한 物類는 그 품수한 形氣가 偏塞하여 天에서 票得한 「性」 즉 「五常의 理」를 두루 具現하지 못하고, 극히 그 一部分만을 發現하게 된다는 것이다. 醇庵의 이와 같은 性理學的 입장은 그의 子弟들에게까지 傳授되어 從子인 老洲 吳 熙常은 洛論의 大家로서 당시 學界의 宗師的 위치에 서서 朝鮮後期性理學에 크게 貢獻한 바는 論外로 한다.

다음에, 本書의 雜識에서 그의 易學에 관한 입장을 一瞥하면, 그는 易을 卜筮에서보다 義理의 면에서 理解하려고 하였다. 즉,“易은 伏羲가 卜筮를 빌어서 八卦를 그었으나, 그 속이는 義理가 具備되어 있지 않음이 없다. 文王·周公이 義理를 主하여 卦辭·爻辭를 붙였으나, 거기에는 卜筮가 兼備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孔子는 오로지 義理로써 傳(十翼)을 만들었으니, 學者들은 중히 여길 바를 알 것이다. ” 易은 詩書禮樂과 같이 敎督하여 通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學官에 排列되지 않았다. 易을 처음 만들 때 卜筮를 빌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易을 太卜에 所藏한 것이지만,만일 太卜에 所藏되었던 때문에 卜筮의 書로 생각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하였다. 또, 雜著의 「十翼辨」에서 孔子의 作이라고 傳하는 易의 十翼에 대한 辨論을 개진하고 있는 바, 十翼에 대하여는 後儒들이 孔子의 著作이라는 점에 懷疑해내려온 지 오랬다. 十翼은 易의 彖·象·序卦·說卦·雜卦·繫辭·文言 등 孔子의 著作으로 알려진 10種의 易傳을 말하는 바, 특히, 宋代의 歐陽修는 文言과 繫辭에 「子日」이라 한 것을 들어 분명히 孔子의 作이 아니고 後世 經師의 杜撰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醇庵은 歐陽氏의 卓見을 肯定的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만 中庸의 例(中庸은 孔子의 孫 子思의 作이라고 傳하는 바, 이에 대하여도 사실 論難이 많지만은, 中庸에서 子思가 乃祖의 말을 引用한 部分이 있음)를 들어, 文言과 中庸은 子思의 作일 것이라는 見解를 피력하고, 이렇게 보아도, 十翼을 彖傳上下, 大象傳 上下, 小象傳 上下, 序卦傳 上下 및 說卦·雜卦로 셈하여 孔子 十翼의 數에 不足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 이상 일일이 소개하기는 너무 冗長한 감이 없지 않아 이만 줄이기로 하고, 끝으로 그의 文學觀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正祖時代는 實學 특히 北學派의 巨臂 燕岩 朴趾源이 「熱河日記」 등의 作品을 내놓아 당시 文壇에 하나의 突風을 불러 일으켰던 때였다. 그리하여, 正祖는 「文體의 反正」이라는 기치를 높이 쳐들어 燕岩類의 變體的 文風을 바로잡아 醇正한 文體로 돌아오게 할려는 노력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側面에서 볼 때, 正祖의 際遇가 극진했던 醇庵은 물론 正祖의 이러한 趣向에 副應하는, 다시 말하면, 종래 古文家들의 「文以載道」的 文學觀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었다. 그것은 醇庵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하였다. 이러한 그의 見解는 「觀書志懷」 題下의 「五言律詩」에서나, 雜著의 「雜說」·「文論」등에 잘 피력되어 있다. 「文論」에서 그 一端을 보면, 文을 四品으로 나누어, 제1品은 天地와 더불어 終始하는 文章, 즉 聖人의 말씀을 실은 經典이라 하고, 제2品은 後世에 傳해 줄만한 文章, 즉 古今을 叅商하여 道를 밝히는 君子의 글이며, 제3品은 國家的 制撰事業에 貢獻하여 一世에 이름을 얻은 글, 제4품은 對偶나 맞추어 世俗을 좇아 變化하는, 즉 科擧에 응시하기 위하여 짓는 文章으로 一時에 善鳴하는 글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鳴時하는 이는 幷世하여 즐비하니 輩出되고, 名世하는 이는 時代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傳世하는 이는 千百年을 지나서야 한 사람쯤 나오며, 聖人의 文은 언제 나타날지 不可思議하다고 하였다. 이야말로 그 主旨가 바로 「文以載道」式 전통적 文學觀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겠다.

〈특성 및 가치〉
어떻든, 吳醇庵은 朝鮮王朝 後期 官學界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文臣이요 學者의 한사람이었다. 本書가 그 당시의 學界·官界의 消息을 알아보려는 이에게 좋은 資料가 될 것이며, 丁酉字本이 아직까지는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本書만큼 깨끗하게 良質의 善本으로 보존되기는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書誌硏究家에게도 높이 評價될 만하다고 본다.

〈집필자〉
朴天圭〈檀國大學校 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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