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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자료명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저자 李衡祥(朝鮮) 撰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4-6061 MF번호 MF35-1966~7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集部/別集類/詩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서지 전자도서관 해제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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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병와전서,甁窩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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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처전자도서관
번호113775
서명甁窩先生文集
저자李衡祥(朝鮮) 撰
판사항木版
간사사항英祖 48(1772)
청구번호K4-6061
MF번호MF35-1966~7
형태사항線裝 18卷9冊:四周雙邊, 半郭 20.4 × 14.8 ㎝, 有界, 半葉 10行20字, 內向二葉花紋魚尾;34.6 × 19.6 ㎝
인기印 : 藏書閣圖書印
안내정보
해제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李衡祥(朝鮮,1653∼1733)撰. 木板. 英祖 48(1722). 18卷9冊 四周雙邊, 半郭20.4×14.8㎝ 有界. 半葉 10行 20字 內向2葉花絞魚尾 30.6×19.6㎝. 線裝. 表題 : 甁窩集 版心題 : 甁窩集 序 : 上之 40年申申 [1764] 仲夏上浣後學平康蔡濟恭(1720∼1799)謹書. 跋:歲壬辰(1772)+一月下浣韓山李象靖(1710∼1781)謹書. 印 : 藏書閣圖書印 紙質 : 楮紙.


-. 著者의 略歷

本書의 著者인 李衡祥의 字는 仲玉 號는 甁窩 또는 順翁이라한다. 璿源系出로 太宗의 二子인 孝寧大君輔의 十代孫이다. 祖父인 長馨은 縣令을 지냈으며 都承旨로 贈職되었고, 父親인 柱厦는 成均館 進士로 參判에 贈職되었다. 甁窩는 孝宗4(1653)年 5月 仁川 <소0x66E3>巖村第에서 出生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才質이 있어 11歲인 顯宗4年(1663)에 讀東史記를 撰하여 長老들을 놀라게 했다 한다. 19歲인 顯宗12年(1671) 父親의 喪을 당하자, 仁川農場에서 自力으로 耕耘 母親을 奉養했다. 25歲인 肅宗3年(1677) 처음 司馬試에 合格되고 3年後인 肅宗 6年(1680) 28歲로 文科에 及弟 다음해 肅宗7年(1681) 29歲에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任命되어 처음 官界에 첫 발을 디뎠다. 그후 栗峯察訪을 위시하여 承文院正字, 戶曹佐郞 兵曹佐郞 慶州經歷 星州牧使, 錦山郡守 淸州牧使 東萊府使 副護軍 五衛將 羅州牧使 濟州牧使 靈光郡守등 內職4年 外職8년 內外職 총12年間의 官職生活을 歷任했다. 본시 청념 결백하고 事理에 밝으며 또한 果斷性이 있었으니 이러한 면모는 그의 官職生活에서 역역히 보여주고 있다. * 그림 1 그가 戶曹佐郞으로 있을 때 冬至使가 가지고 가는 歲弊巾가 해마다 늘어남으로 이를 報布(丙子胡亂 以後 바치던 布類)와 比較하니 9尺이 길므로 앞으로 큰 폐단이 될 것이라 여겨 이를 짤라 보냈으며1), 星州牧使時에는 春饑에 百姓에게 賑恤하고 한편 儒學을 장려하여 20條의 訓帖을 반포하고 儒生 백 오십명을 선출 양성했으며, 仁祖때의 義士인 李士龍(1612∼1640)의 墓에 祭祀지내고 다시, 忠烈祠를 지어 그의 業跡을 길이 남겼으며, 禿用山城이 廢壞 放置되어 있음을 보고 萬餘名 1) 移戶曹佐郞 時冬至使當發 而歲幣布 逐歲增尺 較之丙子報布 其尺加九 公準報布斷之 面稟大臣曰 擅割幣布 # 以<거0x5479>無窮後弊...(行狀) 의 人員을 動員하여 三日만에 築城하였다2). 그후 錦山 德裕上에 도적이 창궐하여 錦山人들이 朝廷에 이들의 소탕을 陳<소0x66E4>하자 文武兼備한 人物로 채택 郡守로 除授되니 도적이 이 말을 듣고 赴任前에 도망가 버렸다 한다. 肅宗20年(1696)에 江都에 들어가 擬進江都誌<소0x66E4>를 올리고 江都誌3)2卷을 撰하여 朝廷에 守禦策을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東萊府使時에는 東萊가 日本과 접촉되는 門戶로써 關防施設의 강구를 역설하고 當時 使節名目으로 渡來하는 差倭의 從來 九送使가 一道의 弊가 됨을 지적하고 이에 시정에 힘썼으나 곧 직책이 갈리고 말았다4). 그후 慶州府尹時에 雲住山 土賊 數千名을 스스로 解散시켰으며 校院에 課業을 권장하고 學風을 振作시켰으며 潘祠등 弊害가 많다하여 이를 불사르고 祠基地를 學宮에 所屬시켰으며 그 외로 胥吏들의 기강을 確立하는등 治蹟이 많았다. 濟州 牧使로 除授되자 더욱 陋俗을 革新하고 敎化에 힘썼으니 三邑의 聖廟릍 修理하고 高名한 학자를 先生으로 모셔 글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高 夫 良 3姓의 祀堂을 세워 제사지내고5) 同姓婚姻의 풍속을 禁止시키고 벗은채로 海物을 採取하는 海女들에게 옷을 제정하여 입게 하였으며 淫祠를 더욱 철저히 단속하여 神堂 129個와 5個所8)의 寺刹을 破毁하고 이에 종사했든 近 千餘名의 巫覡등 285戶를 歸農케하였다. 그가 當時 철폐했든 風雲雷雨壇은 그후 肅宗45年 가뭄이 계속된다하여 島民의 진정으로 다시 設立하기에 이르렀으니7)이러한 사실을 보아 혁신적이고 과단성 있는 면을 엿볼 수가 있다. 그의 濟州에서의 治蹟은 현저한바 있었으나 當時 大靜縣에 安置罪人 吳始復을 偏護한다하여 大司諫 李健命의 啓에 依해 削奪官爵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濟州에서 돌아올 때는 다만 漢拏山 白鹿潭上에서 저절로 말라죽은 나무로 만든 壇琴 一張과 詩草 몇 卷이 不過했다한다. 그후 다시 靈光郡守에 잠시 任命된 후 慶源府使. 判決事. 長端府使 戶曹參議 副護軍등이 除授되었으나 一切 辭任하고 八畏十惡의 <소0x66E4> 萬言을 지어 遯筮錄이라 이름하여 올리고 永川에 浩然亭이란 亭子를 짓고 그곳에서 起居하면서 남은 여생을 오로지 著述로 보냈다. 76歲인 英祖4年(1728) 李麟佐亂으로 일시 慶尙下道 呼召使로 부름을 받았으나 무고로 의금부에 70餘日을 收禁되었다가 無罪로 釋放되었다. 그후 서울 仁川等地에서 寓居하다 英祖9年(1733) 81歲를 一期로 果川 旅舍에서 生을 마쳤다. 그의 墓所는 現在廣州 東午山에 있으며 그의 遺志에 따라 나라 財物을 낭비할 수 없다하여 一切 石物을 쓰지 않고 다만 그의 號名인 甁窩順翁 四字만으로 기록된 基表가 있을 뿐이라 한다. 正祖20年(1796) 當時 判中樞인 尹塾의 推薦으로 淸白吏에 녹선되었다8). 그가 지방 子弟 敎育을 위해 세워진 城南書堂은 죽은 후 이 書院에 祭享되어 오다가 大院君 書院 철폐시에 없어지고 浩然亭만이 아직도 남아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그가 平生에 著述한 著書는 무려 200餘卷에 달하고 있으나 오늘날 刊行되어 알려진 것으로는 本書 18卷 9冊이 있을 뿐이다. 그의 著述은 一部가 遺失되어 없으나 거의 大部分이 아직도 稿本으로 남아 그의 後係들에 依해 傳해지고 있다. 그가 晩年인 80歲에 自述한 自書目錄에 따르면 雜書, 永陽錄, 永陽錄續錄, 芝嶺錄, 芝嶺續錄, 更永錄, 更永錄續錄, 還京錄, 邵城錄, 邵城錄續錄, 復海錄, 史海傾蠢, 易詩, 書, 儀禮, 經傳通解, 文周演, 家禮便考, 家禮或問, 家禮附錄, 家禮圖設 大學, 中庸, 經書採綱, 通書, 西銘, 朱書節要, 北奚字義, 和陶錄, 六藝志, 暗竇索班, 樂學便考, 樂學拾零, 文廟志, 女眞國志, 蒙古國志, 麗朝遷都記, 闢異錄, 廓如錄, 虛實記異, 聖與錄, 西行錄, 南<사0x64B6>錄, 北遊錄, 愼從錄, 追遠錄, # 範選英, 物則篇, 居鄕雜義, 黃堂政要, 訓民語, 大君子孫錄, 毓慶錄, 公私譜<략0x5D19>, 靜安餘<애0x6942>, 江都志, 耽羅志, 丙丁日記, 林將軍傳, 甁窩隨筆, 嘯傲餘噴, 塵屑零談등 200餘卷이 넘는 著述을 남기고 있다. 이 가운데 北溪字義, 暗竇索班 虛實記異 其他 몇 種의 冊을 제외하고 거의 草稿本으로 現存되어 있다.


二. 著書의 內容

本書는 英祖48年(1772)項 刊行本이다.18 卷 9冊으 2)行狀에는 童役用 三日?築이라 쓰여 있으나 康熙 28年 潤三月에 내린 論書에는 禿用山城 近年 風雨幾盡頹<이0x6E9D>而以一州之物力 獨當巨役 一旬內 堅固完了라 하여 一旬內完役이라 記錄되어 있다. 3)이 江都誌는 現在 稿本으로 남아있다. 4)本書 卷7參照 5)本書 卷14, 濟州三姓廟奉安祝文 6)本書 行狀에는 2個所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著書 耽羅 巡歷圖에는 5個所의 寺刹을 破毁했다고 기록되어 있음. 7)先是 濟州自設郡初 有風雲雷雨壇 自本州致祭 牧使李衡祥 以爲非州官所可私祀者 狀聞罷之 其後 島中連年飢荒 <려0x5D32>疫不息 州民以爲崇在壇祀之罷革 訴于今牧使 鄭東後.... 至是 禮曹覆奏請許之 也子從之 自是歲 自京師下送香祝 以祀之 (朝鮮王朝實錄 肅宗45年 11月條) 8)朝鮮王朝實錄 正祖20年 4月條 로 樊巖 蔡濟恭(1720∼1799)의 序文과 大山 李象靖(1710∼1781)의 跋文이 있다. 附錄 行狀은 亦是 樊巖이 서술하고있다. 編輯 刊行은 孫子인 晩松氏에 依한것으로 當時의 板刻은 아직도 後孫들이 保管하고 있다 詩 賦 書等이 大部分을 차지한 本書 內容의 順次를 보면 一卷 五言節句 75首 七言絶句 35首 五言律詩 11首 七言律詩 29首 五言排律 5首 五言古詩 9首 七言古詩 11首 四言絶句 1首 六言絶句 6首 二卷 五言絶句 6首 七言絶句 14首 五言律詩 2首 七言律詩 32首 五言排律 1首 五言古詩 24首 七言古詩 5首 三五七言 4首 九言 1首 三卷 五言絶句 23首 七言絶句 20首 五言律詩 12首 七言律詩 61首 五言古詩 1首 七言古詩 8首 樂 府 24首 四卷 樂 府 48首 箴 39首 銘 22首 頌 1首 贊 10首 五卷 箋 5首 <소0x66E4> 4首 書 11首 六卷 書 3首 七卷 書 10首 八卷 書 15首 九卷 書 24首 十卷 書 26首 十一卷 書 38首 十二卷 物則篇 23首 子集考異 十三卷 雜著 16首 說 9首 策問 2首 十四卷 序 13首 記 1首 跋 2首 上樑文 5首 祝文 6首 十五卷 祭文 14首 墓誌 5首 十六卷 墓誌 9首 墓碣 1首 誅 2首 十七卷 狀 7首 牒 5首 十八卷 牒 6首 附錄 行狀등 順으로 되어있다. 卷 1에서 卷3에 이르기까지는 四, 五, 六, 七, 九言인 絶句 律詩 排律 古詩등 多樣한 類型의 詩 賦로써 輓詞를 위시하여 그가 晩年에 居處하던 城皐를 中心한 永川地方의 情景 親知에게 보내는 詩 賦 그리고 濟州牧使時에 서술한 詩 賦가 大部分을 이루고 있으며 卷 3末에 嶺南詞 次吳喜昌牧午詞 城皐등 樂府 24首가 있다. 卷4에는 樂府 49首가 계속되고 座右箴 冊床八箴 次靜菴戒心藏等 箴 39首 그리고 檀琴銘(濟州에서 携來한 것) 萬古藏銘 浩然亭銘등 銘 22首 그리고 舟水說頌과 五聖贊 夢說贊 順翁贊등 贊 10首가 收錄되어 있다. 卷5에는 大殿 大妃 中殿에게 보내는 正朝箋을 비롯하여 判決事 戶曹參議등을 辭하는 <소0x66E4> 그리고 擬進江都誌<소0x66E4>와 그 외 書 11首가 卷末에 附加되어있다. 卷6에서 卷11까지는 全部가 書文으로 本書 中 가장 많은 部分을 차지하고 있다. 이 書文 中에는 親知間의 安否書信 이외에 李萬敷 鄭思兼 徐宗之 李敏中 鄭相文 尹斗緖등 많은 사람들의 祭禮 喪禮 冠禮 深衣 其他 性理學 樂學 易學 等에 關한 그들의 問目에 解答하는 書文이 있어 그의 思想 學問등을 理解하는 데 重要한 部分이 되고 있다. 理氣說에 대한 鄭思兼의 問目에 對하여 夫理之與氣 相須爲體 相待爲用 此則 理氣之不可相離也 就人而言之 理與氣合 而有心之名 此則 理氣之不可 偏主也9) - -라 하여 理와 氣는 相須 相待하여 體와 用이 되는 것이며 心이란 바로 理氣의 結合을 말하는 것이니 어느 한편만이 主가 되는 것이 아니며 相離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理氣說은 李萬敷와의 書文에도 理氣가 兩樣物이 아니요 相對而生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있다 本書 子集考異에서 西厓의氣非 理不生說에 대해 朱子之訓曰 未有無理之氣 亦未有無氣之理···是故 語類所錄 有是理而後生 是氣 非記聞之誤 則必有爲而論 其先後 之用 決非大全本意也라 하여 理氣는 先後를 따질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朱子語類에 所錄된 理가 生한 후에 氣가 生한다는 것은 記聞의 착오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 하여 朱子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禮樂에 대한 그의 見解는 李萬敷의 問目에 답변하는 書文에 國俗於禮學甚力 雖曲儒狹士 無不瞋目而 爲訟 獨於樂也 其果留意者乎 이와같이 우리나라 풍속이 禮에만 置重하고 樂에 소홀함을 지적하고 樂勝則流 禮勝則離 竊謂流而爲放曠者 必淫樂之勝也 雜而爲黨禍者 必曲禮之勝也라 하여 樂에 치우치면 淫樂에 빠지는 것이요 禮만을 치우치면 黨禍를 일삼게 되는 것이니 禮樂을 <편0x78C8>廢할 수 없는 것이요 다 고루 習得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著書中에는 家禮便考 家禮或問 家禮夕說 등 近 40卷의 禮書와 아울러 樂學便考란 樂書의 著述을 남기고 있다. 이 書簡文 가운데는 그 외 祭禮 喪禮 冠禮 深衣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問目에 답변하는 글이 있으니 그의 禮에 대한 該博한 지식을 찾아볼 수가 있다. 卷12에는 物則篇과 子集考異가 있다 이 物則篇은 人倫에 關係되는 모든 理致를 易卦의 卦辭와 結付 밝힌 것으로 序頭에 天生萬物 有物有則 初非自外至者 乃以父母子婦爲物則篇 附以臣道者 主於家故也라 하여 物則篇의 大體를 要約 說明하고 細目으로 23篇을 서술하고 있다. 子集考異에서는 花潭의 虛者氣之淵 西厓의 氣非理不生說등 10餘篇의 考異가 있다.虛者氣之淵에 대해 氣者己有生發 已有痕跡 已有方所 何必更引虛字爲言乎라 하여 氣란 이미 生發하고 痕跡이 있고 方所가 있는 것이니 여기에 다시 虛字를 끌어들일 수 없는 것이라 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卷13에는 雜著 說 策問으로 格物物格辨, 行藏辨 등 雜著 16首, 그리고 李萬敷의 問目에 答하는 璣衡說 順翁說 易爲卜筮書說등 說 9首, 策問 2首가 있다. 卷14에서는 濟州牧使時 畵工 金南吉을 시켜 그리게 한 耽羅巡歷圖序, 文周衍序 報反儀式序 家禮便考序등 本書에 記載되지 않은 自著의 序文과 其他 몇篇의 序文이 있으며 甁窩記, 그리고 永川先生案跋 支于亭遺事跋, 上樑文으로는 浩然亭上樑文, 濟州三姓廟上樑文 城南書堂上樑文 考寧大君祠宇重修上樑文, 祝文으로 冠岳山祈雨文 濟州三姓廟奉安祝文 등이 있다. 卷 15와 卷16에는 主로 祭文 墓誌 墓碣 誅文등으로 李玄祚 孫德升 金一夔 沈季良등 平素 交友가 깊던 사람들과 側近家族들의 祭文 그리고 10代祖 孝寧을 위시한 9代祖 瑞原君 從弟 衡瑞등 先祖 家族의 墓誌銘과 徐士增 洪重夏의 誅文이 있다. 卷17 卷18은 狀 牒 그리고 끝으로 附錄 行伏이 있다. 이 狀 牒등은 奉常寺直長 東萊府使 濟州牧使 星州牧使 慶州府尹등 그가 官職當時에 올린 狀 牒으로 奉常寺報禮曹에서는 奉常寺 神室 奉安位版이 位次가 뒤바뀌고 字畵이 雨默으로 더러워짐을 지적 이에 改修를 위해 文獻을 상고하여 이를 시정했으며, 慶州井田基 址犯割請立禁牒에서는 慶州 西南 五里地占에 엣날 井田基址가 있음을 發見하고 이를 遺跡地로 保護해 줄 것을 진정하고 其他 星州田政變通牒 東萊關防變通狀 東萊差倭問答狀啓 濟州民<막0x5FC2>狀 등 當時 民情이나 地方實情을 세밀히 조사 파악하여 올린 狀 牒들로 그의 관직時의 行蹟을 알아보는 귀중한 資料가 된다. 끝으로 附錄 行狀이 있다. 그의 學問은 性理學 禮學을 위시하여 天文 地理 七史 譜學등 넓은 分野에 걸쳐 該博한 智識을 가지고 있으며, 文體의 內容은 主로 수직적인 語句보다 事物을 정확히 관찰하고 文獻을 상고하여 밝히고 있다. 특히 歷史的인 遺蹟등을 찾아내어 保護에 힘쓰는 한편 民生에 害가 되는 것은 過去의 遺習에 구애됨이 없이 과감히 이를 제거하여 社會改善에 노력하는 등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本書는 그의 著書의 全部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그의 思想 學問의 一端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9) 本書 9卷 p.16


〈집필자〉
崔淳姬(文化財專門委員)
청구번호_정렬01_K4-6061
자료분류고서 > 장서각 본도서 > 한국본 > 集部 > 別集類 > 詩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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