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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영릉비(世宗大王英陵碑)

자료명 세종대왕영릉비(世宗大王英陵碑) 저자 저자미상(著者未詳)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장서각통합뷰어* 원문이미지
키워드 K2-5231-1, K2-5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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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여주시
· 작성시기 1745
· 비고 [건립/중립 연대] 1745년(건립)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도(李祹) 1397 - 1450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237.0([陰記]238.2) X 96.0([陰記]95.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탁본서체 [碑額]전서(篆書)/[碑身]해서(楷書)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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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영릉비(英陵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세종대왕영릉비(世宗大王英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4대 국왕 세종(世宗, 1397~1450)과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능인 영릉(英陵) 앞에 세워진 능비(陵碑)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영릉은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에 소재한다. 소헌왕후가 1446년(세종 28) 승하하자 7월 광주(지금의 서울 강남구 내곡동) 헌릉 서쪽에 봉릉하였고, 세종이 1450년(세종 32) 승하하자 헌릉 서쪽에 봉릉하였다. 그 후 세조(世祖) 때 이곳이 불길한 곳이라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결국 1469년(예종 1) 경기도 여주로 천장하여 단릉(單陵)의 합장 형태로 조성하였다. 세조의 광릉(光陵) 능제를 따라 석실과 병풍석은 쓰지 않았다.
영릉비의 전면에는 ‘조선국 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부좌(朝鮮國 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祔左)’가 소전체(小篆體)로 새겨져 있다. 음기에는 세종의 탄생, 수선(受禪), 승하, 장지, 능의 위치, 이장위치, 향년,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장헌(莊憲)’ 등을 기재하였다. 왕비 소헌왕후에 대해서는 탄생, 세자빈 책봉, 왕비의 진봉(進封), 승하, 장지, 능의 위치, 이장위치, 향년 등을 기재하였다. 마지막 줄에는 ‘숭정기원후일백십팔년을축 립(崇禎紀元後一百十八年乙丑 立)’이라 기재하여 1745년(영조 21)에 비석을 세웠음을 밝혔다.
이보다 앞서 1738년(영조 14) 9월 30일, 조정에서는 조선 전기 국왕들의 신도비를 재건립하는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연성수(蓮城守) 이근(李槿)이 영릉(英陵)에 옛날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는데, 천조(遷厝)하였을 때 묻어버리고 세우지 않았으니, 찾아내어 옮겨 세우자고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물다. 대신 가운데 김시위(金始煒)가 “일찍이 《필원잡기(筆苑雜記)》를 보건대, ‘태조·태종·세종의 세 능에 모두 신도비가 있었고,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에 장차 신도비를 세우려 하였는데, 그 때의 조정 의논이 제왕(帝王)의 사적은 모두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가(私家)처럼 비를 세울 것이 없다고 하여 마침내 파하였었으며, 그 이후부터 원릉(園陵)에 다시는 비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릉의 천조(遷厝)는 예종조(睿宗朝)에 이미 비를 폐지하기로 한 뒤에 있었기 때문에, 세웠던 신도비 또한 묻어 두고 옮겨 세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이후 10월 8일,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영릉의 신도비를 묻은 곳을 간심(看審)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헌릉(獻陵)의 서쪽 등성이 그전의 영릉 자리 곁에 나아가 땅을 3척쯤 파자, 과연 묻어 놓은 신도비를 찾게 되었는데, 글자가 모두 떨어져 나가 변별(變別)할 수 없었고, 유독 용두(龍頭)밑에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라는 전문(篆文) 여섯 글자만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영조는 글자 획이 흐려져서 다시 세울 수 없다 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그전 자리에 묻게 하였다. 이후 실록의 기사에서는 영릉비의 재건립에 대한 논의가 보이지 않지만, 장서각에 소장된 영릉비 탁본을 통해 논의가 있은 지 7년 후인 1745년(영조 21) 비석이 다시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영릉비는 전면과 음기를 각각 한 점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석류문(石榴紋)이 있는 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상하좌우의 사양(四鑲)에도 석류문이 있는 비단을 대었다. 비단의 석류문은 매우 섬세하며, 가지와 석류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천리에는 풍대(風帶)를 대었다.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으며, 목축(木軸) 좌우의 마구리(莫只)에는 옥을 부착하지 않았다. 천리의 길이는 지리의 1.5배 정도의 비례로 되어 있다.
피전자 세종의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정식 명칭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었다. 1418(태종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에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태종은 이후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여 어려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즉위 뒤 정치·경제·국방·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건국 초기의 강압적 왕권과 훈신세력 등이 사라지고, 온유한 유가적 자질의 신권과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의 만남으로 유교정치를 폈다.
세종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 등을 등용해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태종 때부터 시행되던 6조직계제를 유지해 국정을 직접 관장했으나, 1436년(세종 18)에는 다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실시해 의정부의 의결 기능을 부활시키고 의정부와 6조의 관계를 정비하였다. 나아가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을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특전을 주었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주어 학문에 정진토록 하였으며, 정치 자문·왕실 교육·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한편, 집현전에서 수많은 학술연구를 통하여 다양한 연구서적과 역사서(유교경서, 의례서, 문학서, 훈민정음 관계서, 지리서, 농서, 역사서, 법률, 천문 등)를 편찬토록 하였다. 나아가 경자자(庚子字,1420)·갑인자(甲寅字,1434))·병진자(丙辰字,1436) 등의 새로운 활자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이름난 활자이다. 이를 이용하여 여러 서적을 출간하여 출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실록(實錄) 등 국가의 역사서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 외에 전주(全州)·성주(星州)를 포함하여 4대 사고(史庫)를 확립하였다. 세종대에는 집현전을 중심으로 학문연구가 활발하여 『고려사(高麗史)』, 『속육전(續六典)』, 『농사직설(農事直說)』,『시학절목(視學節目)』,『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류취(醫方類聚)』,『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동국정운(東國正韻)』,『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석보상절(釋譜祥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같은 주요 도서들이 수찬, 간행되었다.
피전자 소헌왕후의 본관은 청송(靑松), 아버지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 어머니는 소의공(昭懿公) 안천보(安天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에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충녕(세종)과의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첫 1417년에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4월 충녕이 왕세자에 오르자 경빈(敬嬪)에 진봉(進封)되었으며, 8월에 세종이 즉위한 후 바로 공비(恭妃)가 되었다가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개봉(改封)되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한 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으나 비(妃)로서의 내조의 공이 크고, 많은 자녀를 낳아 왕실의 안정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무사하였다. 1446년 52세로 사망하자 헌릉에 장사지냈고, 뒤에 세종의 능인 영릉으로 이장하였다. 1452년(문종 2)에 존호를 추가해서 올렸는데, 훌륭한 자손을 낳아 큰 제왕의 자리에 오르도록 했다 하여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에 추상(追上)되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 전기 국왕과 왕비의 능비를 후기에 개립(改立)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18세기 중반 금석문의 제작과 장황방식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 2003.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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