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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공유적(桃源公遺蹟)

자료명 도원공유적(桃源公遺蹟) 저자 전종(全琮)
자료명(이칭) 桃源公遺蹟 採薇軒先生遺蹟 , 도원공유적 채미헌선생변적(桃源公遺蹟 採薇軒先生邊蹟) 저자(이칭) 전종(조선) 편(全琮(朝鮮) 編) , 全琮(朝鮮) 編
청구기호 K2-401 MF번호 MF35-1597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傳記類/叢傳/一般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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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865(고종 2년)
· 청구기호 K2-401
· 마이크로필름 MF35-1597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전종(全琮)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2.7 X 22.0
· 판본 목활자본(木活字本)(방정리자(倣整理字))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2.8×15.5cm
· 인장 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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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려 太祖 王建을 도와 고려 건국에 많은 공을 세운 桃源公 全以甲과 그의 후손 採薇公 全五倫의 事蹟 및 遺文을 모아 1865년(고종 2)에 간행한 책이다.
서지사항
表紙書名, 書根題는 ‘桃源集’, 版心題는 ‘桃源遺蹟’이다. 표지는 황색으로 回文 바탕에 연화문이다. 표지 서명 하단에는 ‘全’으로 표기되어 있다. 제1면 우측 상단에는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많은 공을 세운 전이갑과 그의 후손이며 고려 말 학자로서 고려가 망하자 杜門洞에 들어갔던 전오륜의 事蹟 및 遺文을 후손 全琮이 모아서 1865년에 간행한 것이다.
첫머리에 目錄이 실려 있고, 이어 李景在1859년(철종 10)에 지은 「全氏遺蹟序」가 붙어 있다. 본문의 처음에 나오는 「太史公行狀」은 전이갑에 대한 행장이다. 전이갑의 자는 子經, 호는 桃源, 본관은 旌善이며, 阿飡 全禹根의 아들이다. 裴玄慶·申崇謙 등과 함께 왕건에게 권유하여 王位에 오르게 했으며, 後三國 통일을 위해 후백제군과 싸우다가 동생 全義甲과 함께 포위된 태조를 구출하고 戰死하였다. 太師兼尙書左僕射에 追贈, 旌善君에 追封되었고, 諡號는 忠烈이다. 이어서 「杜門洞碑文」과 「碑陰記」, 「致祭文」, 「御製聯句」 등 조선 국왕이 지은 글을 비롯하여 「太史公記遺」 등이 차례로 실려 있다.
다음에 실린 「採薇軒先生遺蹟」은 전오륜에 대한 글이다. 전오륜의 字는 仲至, 호는 採薇軒이다. 1360년(고려 공양왕 9) 文科에 급제한 후 晉州牧使를 거쳐 刑曹典書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고려가 망하자 杜門洞에 들어가 태조에게 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으나, 후에 석방되어 瑞雲山에 은거하였다. 특히 性理學에 밝았으며, 鄭夢周 등과 교유하였으며, 安義西山書院에 祭享되었다. 이어 「字說」, 「不朝峴言志錄」, 「功勳錄」 등 관련 글이 실려 있다.
다음에 나오는 「文謹公牧民遺事」는 全輔仁(?~1019)이 지방관으로서 치적을 올린 것을 기록한 글이고, 「杜門洞錄」은 두문동에 은거한 太學生 69명, 武臣 48명, 判寺事 8명의 성명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한 글이다. 「全氏世系分派圖」는 전씨의 유래를 그림으로 표시한 도식이다. 마지막에는 1865년(고종 2)에 지은 전종과 鄭文昇의 발문이 있다.
특성 및 가치
전이갑전오륜의 사적 및 遺文을 토대로 羅末麗初와 麗末鮮初의 정치적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집필자

김채식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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