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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대왕덕릉비(穆祖大王德陵碑)

자료명 목조대왕덕릉비(穆祖大王德陵碑) 저자 이안사(李安社),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13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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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현재주소: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
· 작성시기 1901
· 비고 2-5213
1901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안사(李安社)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26.0 X 67.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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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 덕릉(德陵)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목조대왕덕릉비(穆祖大王德陵碑)
[내용 및 특징]
대한제국기인 1901년(광무 5) 목조의 덕릉에 세운 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장황하였다. 목조는 태조의 고조부이다. 전면은 ‘대한/목조대왕덕릉(大韓/穆祖大王德陵)’이라고 소전으로 새겼다. 음기는 목조의 간략한 이력을 해서로 써서 새겼다. 덕릉표석의 찬자와 서자, 전서자는 모두 고종(高宗)이다.
덕릉은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 10) 함남 신흥군 가평면 능리로 옮겼다. 개석도 없고 문자가 마멸되어 함경도의 신하에게 개수할 것을 명하였다. 1901년 5월 고종은 친필로 표석을 써서 다시 세웠다. 1901년(광무 5) 3월 5일 고종은 조령을 내려 “함경도(咸鏡道)에 있는 팔릉(八陵)의 표석(表石) 앞면의 글과 음기(陰記)는 모두 친히 써서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팔릉은 태조 이전 임금으로 추존된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의 능. 즉 덕릉(德陵), 안릉(安陵), 지릉(智陵), 숙릉(淑陵), 의릉(義陵), 순릉(純陵), 정릉(定陵), 화릉(和陵)을 말한다. 이로써 이때 다시 세워진 표석은 모두 8개이며, 모두 고종의 친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6년(광무 10)에는 팔릉의 비각을 영건하고 표석을 세울 때의 감동(監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규장각에는 이 표석들을 모두 모은 『북팔릉비문(北八陵碑文)』이 소장되어 있다. 8첩의 책이 가로 23.9㎝, 세로 36.1㎝의 호접장본으로 꾸며졌으며, 표지에는 ‘北八陵碑文(북팔릉비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목조는 전주이씨 17세 양무(陽茂)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이다. 고려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원나라 지방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현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의 계좌(癸坐)에 있다.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현재 위치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고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현 위치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전주이씨는 대대손손 전주의 자만동에서 살다가 17세손 양무장군과 18세손 목조대왕의 세대에 이르러 일족은 전주를 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때는 1230년(고려 고종 17)으로 27세 무렵의 일이었다.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이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고자 목조대왕은 부친인 양무장군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ㆍ괴산(傀山)ㆍ제천(提川)ㆍ정선(旌善) 등의 직선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함께 따르는 일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 같은 해 목조대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양무장군의 묘는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의하면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의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현 校洞)이 있었는데 이곳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에도 유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1900년(광무 4)에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라고 새겨 세웠으며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이 금석문의 탁본 또한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고종황제의 어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전주읍지(全州邑誌)』 / / 『북팔능표(北八陵表)』(규장각, 10101, 10010, 10015, 10097)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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