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증교지(追贈敎旨)
· 서지정보 서지 xml
한글문서명 | 추증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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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서명 | 追贈敎旨 |
이명(한글) | |
이명(한자) | |
수취(한글) | 국왕 |
수취(한자) | 國王 |
발급(한글) | 하위보 |
발급(한자) | 河魏寶 |
찬자(한글) | # |
찬자(한자) | # |
발급목적 | 1617년(光海君9)에 河魏寶가 아들의 功勳에 의해 추증된 敎旨. |
간행년(서기력) | 光海 9 1617 - |
유형 | 고문서 |
크기 | 77.5x86cm |
관인수 | 1 |
청구기호 | |
소장처 | 원소장처와 동일 |
소장처1 | 경상남도 |
소장처2 | 진주시 |
소장처3 | 대곡면 단목리 하순봉 |
MF | 10588-10597 |
자료유형 | 전통명가소장고문서자료(전통시대지방사회경제사자료) |
해제정보
해제작성자 | 김봉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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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작성일 | 2003-06-20 |
간행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해제작성언어 | 국한문 혼용 |
해제내용 |
告身1
김봉좌
【정의】
1617년(光海君9)에 河魏寶가 아들의 功勳에 의해 추증된 敎旨.
【내용】
[주제]
1617년(광해군9)에 하위보가 아들의 공훈에 의해 추증된 교지이다. 하위보는 이미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曺叅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진평군(晉平君)’에 증직(贈職)되었다. 아들 하협(河悏)이 정운공신 1등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공신칭호 및 君號는 그대로 둔 채 관품과 직급을 한 단계씩 올려 추증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敎旨의 맨 뒷부분에 있는 追記 즉 ‘정운원종공신 1등 하협의 아버지를 왕명에 따라 추증한다’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용어]
[인물]
河魏寶(1527-1591)는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河沆, 崔永慶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아울러 후학의 양성에도 힘써 남명의 학문전파에 기여하였다.
河悏(1583-1625)은 하위보의 막내아들로 자는 子幾, 호는 丹池이다. 임란을 전후한 시기에 부모상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때 손위 형인 하변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었다. 하협은 형제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하변의 귀국을 도모했는데, 그의 남다른 형제애는 진주일대에 이름 높았으며 효성 또한 지극했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성장과 교유는 하위보가 남명학파의 핵심인물이었던 점에서 남명학파와의 깊은 연계선상에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협은 진사로서 ‘定運原從功臣’ 1等에 策勳되기도 했다.
[지명]
【특징】
【비고】
【참고문헌】
『古文書集成』60(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06.06 해제작성,입력,교정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작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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